조선시대 광주 최고의 부자였지만, 재산을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회재 박광옥 선생

기아문화재지킴이?"내 고장 문화재 가꾸는 날"?활동을 벽진서원에서 진행

김오현 시민기자 승인 2023.04.26 07:47 | 최종 수정 2023.04.26 07:52 의견 0

"내 고장 문화재 가꾸는 날" 활동 단체사진



삶의 행복은 사소한 일에 대한 감사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네요. 따사로운 햇살 아래 연초록빛 움트는 4월 23일(일)에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연합회에서 주관하는 "내 고장 문화재 가꾸는 날" 활동을 서구 벽진서원에서 봄날의 햇살을 맞으면서 진행하였다. 회사가 바빠서 회원님들께서 매월 토요일도 없이 주ㆍ야로 일해야 하는 관계로 많은 회원이 참석하지 못해 아쉬움은 남지만, 그래도 20여명의 회원님과 가족들이 참석하여 진행하였다.

회재유집목판(양면 137면 69매)

종 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

명 칭

회재유집목판

지 정 일

1996년03월19일
소 재 지 광주광역시 서구 송풍로 42(풍암동 769-1)



이 판목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1526∼1593)선생이 남긴 유집의 목판이다. 문집은 임진왜란 이전과 전쟁 당시의 기록으로써 1권은 시 299편, 2권은 잡서 2편, 서 2편 등 6편, 부록(상권은 연보, 하권은 행장), 수적을 새긴 별부로 되어있으며, 총 137면이고, 양면으로 판각되어 있다. 임진왜란의 전후를 연결하는 시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회재 박광옥 및 벽진서원(해설 김오현)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3). 조선 중기 문인으로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다. 회재(懷齋)선생은 현재 대동고등학교가 있는 개금산 아래 매월동 회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조광조의 제자였던 정황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시작하여 21세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바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문과 준비에 전념하지도 않았는데, 그 해 형이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재산관리와 집안을 일으키는 일이 선생의 몫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정한 형제들 처럼 같이 잡초 제거 작업



회재(懷齋)선생은 고향에 머물면서 서당을 세우고 향교 중수에 참여하는 등 지방 교육 발전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광주향교가 중수된 뒤 향교비음기(鄕校碑陰記)를 청하자 전면 비문은 고봉(高峰) 선생이 짓고, 회재(懷齋)선생은 비석 뒷면에 음기(陰記, 비석 뒤에 새긴 글)를 지었다.

그러는 와중에 회재(懷齋)선생은 사비를 들여 제방을 쌓았다. 가뭄으로 고통받는 매월 · 벽진마을 백성들을 위해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둑을 쌓고 ‘개산방죽(현재는 전평제)’이라 불렀다.

회재(懷齋)선생은 재산 불리는 일에 골몰하기보다는 그것으로 구휼하는 일에 더 가치를 두었다. 그 제방이 당시는 가뭄을 해결하는 방죽으로,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방죽 위에 수월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사암(思菴) 박순(1523-1589), 고봉(高峰) 기대승(1527-1572), 제봉(霽峰) 고경명(1533-1592) 등과 함께 학문을 논하고 우정을 쌓았다. 율곡(栗谷) 이이(1536-1584), 옥계(玉溪) 노진(1518-1578) 등과도 교류하였으며, 칠계(漆溪) 김언거(1503-1584)의 풍영정까지 나아가 시를 논하기도 했다.

계단 및 배수로 청소중...



그는 45세 늦은 나이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관 교관으로 첫 벼슬을 시작했다. 49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 운봉현감(1577년)이 되어 태조 이성계의 그 유명한 ‘황산대첩비(황산(荒山)에서 왜구를 섬멸하여 크게 이긴 일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를 세운다.

이 비는 고려 우왕 6년(1380년) 이성계가 남원 운봉읍 화수리 황산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섬멸한 대첩을 기린 비다. 400여년을 지켜오던 이 비는 일제에 의해 1945년 폭파되어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1957년, 파손된 비석들을 한곳에 모아 다시 비각을 세운 것이 지금 남아 있는 ‘파비각(破碑閣)’이다.

그가 외직인 수령으로 나가면서 가장 신경 쓴 일은 향교를 살피고 고을 자제들에게 학문을 강독하는 일이었다. 영광군수 시절에 성균관을 모델로 세운 향교는 호남 최대 규모였다. 그의 청렴과 목민관의 자세는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감동시켰고 운봉의 백성들은 그를 잊지 못해 치적을 돌에 새겼다. 영광과 밀양에도 그를 기리는 송덕비가 있다.

배수로 잡초, 퇴적물 제거

배수로 청소 후 깨끗한 모습



조선시대 호남의 3대 부자하면 해남의 윤선도, 보성의 안방준 그리고 회재 박광옥이라고 한다. 지금의 광주광역시 월드컵경기장, 풍암지구의 센트레빌 아파트 등이 음성박씨 문중 땅이었다.

그는 관직을 떠나 낙향해 있던 와중에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고경명,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권율 장군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회재(懷齋)선생은 고령(1592년 당시 67세)과 노환으로 직접 출전할 수 없게 되자, 사재를 털어 ‘의병도청’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모아 조달하는 일을 맡는다.

1, 2차 호남근왕병 출병 때도, 김천일과 고경명의 거병 때도 병사와 무기 지원을 도맡아 했다. 권율의 ‘이치전투’와 ‘행주산성’의 전투 당시 연고가 없는 전라도 의병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회재(懷齋)선생이 이들을 모집하고 군량을 지원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선조는 의병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승정원 판교에 이어 나주 목사에 제수한다. 그리고 나주 목사로 재임하다가 병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온 박광옥은 1593년 68세로 생을 마감한다. 사후 벽진서원에 배향되었고 1681년 김덕령이 추가 배향되면서 의열사로 사액을 받았다. 그 뒤 1694년에 오두인(吳斗寅)과 김덕홍(金德弘)·김덕보(金德普)를 추가 배향하였다. 그러나 고종 때 훼철(1868년), 1927년 서구 금당산 아래 ‘운리영당’을 신축해 향사해오다 도시개발로 편입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2018년 다시 ‘벽진서원’으로 복설하여 향사해 오고 있다.

배수로 잡초, 토사 퇴적물, 나무 뿌리 제거



벽진서원은 박광옥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사당과 숭본당(崇本堂)을 포함하여 연건평 77.2평과 주차장 포함 총 부지 1,005평으로 조성되었다. 소장한 유물로는 유상(遺像), 『회재유집(懷齋遺集)』목판각(양면 137면 69매, 문화재명칭은 “회재유집목판”,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 등이 있다.

나무뿌리 제거하다 부러진 삽자루 모습

배수로 청소 후 모습(사진촬영 오현)



◾참고문헌

1. 정중수 · 정인서, [진정한 광주인 회재 박광옥],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2019.


2. 벽진서원, [유교아카데미 운영교재], 벽진서원 교육문화분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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