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의 조선 브로맨스 이야기 - 역사탐방(7탄)

-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시대 성리학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의 핵심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다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3.25 11:12 | 최종 수정 2024.03.25 11:52 의견 0

13년간 12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조선 최고의 학자들과 만나는 시간이라는 주제로 음악 낭독극/조선, 브로맨스 퇴계와 고봉선생의 포스터 사진(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사진)

천원권 지폐에 등장하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배움에 있어 늘 열린 자세를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단순히 선현의 가르침에만 귀 기울이지 않고, 나이 어린 제자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며 학문적 사상을 나누고 또 배우기를 즐겼다. 이는 아들뻘인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과의 인연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번 역사탐방에서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의 아름다운 브로맨스를 통해 조선시대 성리학의 르네상스를 살펴보고자한다.

도산서원과 월봉서원의 전경(사진제공 문화재청)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

◾퇴계 이황(退溪 李滉)

안동 출신의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은 조선의 국가 이념인 성리학의 수준을 격상시킨 학자로 평가받는다.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34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부정자로 관리 생활을 시작한 그는 무려 70세에 타계할 때까지 조정에서 140회 관직에 임명됐으나 무려 77번이나 고사하는 무욕(無慾)의 경지를 과시하기도 했다. 임금과 선비들의 존경을 받던 이황은 관직에서 물러나 1561년(명종 16) 고향인 안동의 도산서당에서 후학(後學) 양성에 매진했다.

도산서당은 단순한 학교가 아닌 스승과 제자가 자유롭게 학문적으로 토론하며 지혜를 쌓았던 곳으로 이황 서거 후에 도산서원으로 확장됐다. 이황은 배움에 있어 늘 열린 자세를 지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단순히 선현의 가르침에만 귀 기울이지 않고, 나이 어린 제자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며 학문적 사상을 나누고 또 배우기를 즐겼다고 전한다. 이는 아들뻘인 기대승과의 인연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인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1572)은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시대 성리학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인물이다. 고봉(高峰)은 3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검상(檢詳)·사인(舍人)등 찬란한 벼슬을 거쳤고, 부제학·예문관직제학·성균관 대사성·대사간·공조 참의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그는 언관(言官)의 직책에 있으며 곧은 말 잘하기로 세상에서 유명했으니, 조광조·이언적 등 억울하게 사화(士禍)를 당한 옛 어진 이들을 복권하고 증직하자는 주장을 펴서 모두 실현시키기도 하였다. 고봉은 벼슬살이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으나, 역시 그는 학자였다. 퇴계와의 학문 논쟁으로 조선 성리학의 새로운 틀을 짜낼 수 있었고, 후배인 율곡에게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성리학 이론을 주장한 점도 크게 주목받을 일이었다.

도산서당의 기숙사 역할을 했던 농운정사에서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회원과 가족들이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이사장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사진촬영 고경임)

◾나이와 지위를 초월한 교류(交流)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의 첫 만남은 1558년(명종 13년) 10월 이뤄졌다. 은퇴 후 고향 안동에서 지내던 퇴계 이황은 임금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상경해 있었다. 마침 과거에 합격하여 초임 관리가 된 기대승은 이황이 한양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평소 흠모하던 이황에게 인사를 드리고 가르침을 받고 싶다면서도 그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당시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당돌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었고, 이황(李滉)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과거에 막 급제한 선비였고 이황(李滉)은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 지금의 서울대총장격)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나이나 지위 같은 통념은 두 사람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이는 이황이 기대승을 나이 어린 풋내기라 생각하지 않고, 존중의 자세로 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황은 열린 마음으로 기대승을 논쟁의 상대로 받아들였고, '통유(通儒:학문에 통달한 유학자)'라 칭하며 교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13년 동안 무려 12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펼쳤지만, 사실 이러한 편지의 내용에는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것만이 있던 것은 아니다. 정치에 대한 의견과 각자의 가정 이야기와 고민 등 개인적이고 나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던 것이다.

안동 소박한 도산서당 전면 모습과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회원들이 해설사에 집중하는 모습(사진촬영 문화재청 및 박정세)

◾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다. 그리하여 당시 학자들 간의 성리학을 주제로 한 논쟁이 제법 있었다. 특히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펼친 이른바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 이것은 ‘인간의 선한 감정을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논쟁이었다. 그럼 사단칠정(四端七情)이란 무엇인가. 사단칠정은 성리학의 철학적 개념 가운데 하나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의 사단(四端)과 인간의 자연적 감정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을 뜻한다. 이황(李滉)은 그러면서 ‘사단(四端)은 항상 선한 것이요, 칠정(七情)은 선과 악이 섞여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기대승(奇大升)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둘로 분리되어 작용하는 감정(感情)이 아니라, 칠정(七情) 가운데 선한 부분이 사단‘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철학에 관한 문제로 딱히 정답이 정해져 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500여 년전 선조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무려 13년간 120여 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논쟁(論爭)을 벌였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조선 성리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훗날 율곡 이이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2024' 월봉서원·도산서원 동계 강학회 포스터, 월봉서원 빙월당의 모습과 기아국가유산지킴이 스터디 활동으로 저녁행사 참여 전 월봉서원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사진촬영 박정세)

조선 성리학의 거두로 퇴계 이황(退溪 李滉) 과 이이 율곡(栗谷 李珥)은 지폐에도 그 얼굴이 그려질 만큼 상당히 유명한 인물인데 반해 고봉 기대승에 대한 것은 알려진 바가 적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퇴계와의 논쟁을 통해 그가 알려졌지만, 결국 퇴계라는 인물이 그를 가릴 정도로 너무 컸다고 보고 있다. 또한 1572년(선조 5) 향년 4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정치적 영향력도 크지 않았다. 이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고봉이 길러낸 제자(최경회, 고경명, 정철, 정운룡, 최시망 등)들이 의병으로 나아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그의 흔적을 알리는 데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고봉 기대승은 조선 성리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그의 업적이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다. 최근 그의 학문적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으며, 앞으로 그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 참고문현

1. 한정주·엄윤숙, [조선 지식인의 비평 노트;기대승에 대한 비평], 고전연구회 사암, 2007.

2. 행운스타, [이황 vs 기대승, 소통의 의미를 일깨우다!], 네이버 블로그 '다양한 일 상 정보제공', 2021.

3. 산골 곰돌이,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네이버 블로그 '곰돌 이의 역사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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