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목과 청송사

청송사를 통해 태고보우와 홍주목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범상스님 승인 2024.01.13 06:19 의견 1

홍주는 충주, 청주, 공주와 더불어 충청 4목 중의 하나였다.

독립운동의 성지 홍주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같은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1,2차 홍주의병을 일으켰으며, 한용운, 김좌진, 윤봉길 등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다. 일제는 1914년 행정개편을 강행하면서 홍주를 홍성으로 개칭했고, 대전을 도청소재지로 삼았다. 이는 홍주의 항일정신을 지우겠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회복의 측면에서 해방이후 가장먼저 지명을 되찾았어야 할 홍주는 현재까지 이름을 회복하지 못한 유일한 목(牧)으로 남아있다.

고려사와 태고보우(이하 보우)행장 등에 따르면 공민왕 5년 보우가 왕사가 되었고, 그 덕화를 기려 내향(內鄕)인 홍주를 목(牧)으로 승격시켰다고 한다(太祖實錄 十年三月 王入運州 註云, 卽今洪州 恭愍王五年 以王師普愚內鄕 陞爲牧). 그리고 어머니의 출신지인 모향(母鄕)은 양근은 군(郡)으로 승격했다.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는 아버지의 출신지인 내향과 어머니 출신지인 모향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기록을 근거로 정리해보면 ‘보우의 속성은 홍주 홍(洪)씨요, 아버지의 고향은 홍주이다. 아버지는 양근에서 살았고, 출생지는 어머니 고향인 양근이다’가 된다.

내향과 모향을 엄격 구분했던 것은 당시 결혼제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율곡의 예에서 보듯이 율곡은 외가(모향)인 강릉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현모양처로 알려진 신사임당 역시 시집살이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율곡의 형제들이 재산을 나누었던 분재기에는 남녀구분이 없었고, 서모(庶母)에게까지 골고루 분배되었다.

‘장가든다’는 말이 있듯이 이 같은 결혼풍습과 재산분배는 고려 때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부모의 재산에 대한 권리와 의무는 남녀형제들 간에 동등했다. 그래서 재산이 많은 집안에서는 재산 이동의 문제로 결혼을 시킨 뒤에도 딸들을 시집으로 보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뿐만 아니라 권세가 있는 남자는 부인을 여럿 둘 수 있었어 처가를 가끔씩 방문하거나 아니면 들어가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보우가 왕사가 되면서 홍주가 목(牧)으로 승격되었다는 것은 지금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고향의 문제와는 사뭇 다르다고 본다. 그리고 당시 홍주에는 홍주 홍씨-운주(홍주)성주 긍준은 왕건을 도와 고려창업에 공을 세웠고 그의 딸은 왕건의 12번째 비(妃)인 홍복원부인이 된다. 긍준은 후에 삼중대광의 벼슬로서 홍규라 불렀고, 홍주 홍씨의 시조가 된다.- 즉, 보우 집안들의 세력이 강성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보우는 양근군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출가했던 관계로 홍주에는 홍주목 승격과 청송사에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 외에는 현재까지 관련 유적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보우가 홍주에서 활동했거나 영향력이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조선중기에 활동했던 백암성총(1631~1700)의 <백암집> 홍주팔봉산용봉사신루기(洪州八峯山龍鳳寺新樓記)이다. 여기에는 신루기(新樓記)를 부탁한 훈(勳)상인에 따르면 “다만 태고 스님이 처음 개창하여 임자년 난리에 화재로 쇠락한 것을 지금 새로 짓는다고만 하였다(只道 太古始剏之。壬子灾欝攸。今新之)”는 대목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팔봉산에 용봉사, 청송사, 영봉사가 소개되고, 「동국여지지」에는 팔봉산의 다른 이름으로 용봉산이 기록되어 있다(八峯山 在州北八里 一名 龍鳳山). 이보다 앞선 1607년 홍주목사를 지낸 이안눌의 시(詩)에서도 팔봉산과 용봉산이 동일한 산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토대로 1998년 6월 「동국여지승람」과 짝을 이루어 편찬되었다고 추정되는 지도책 「동여비고」가 발견되면서 팔봉산의 용봉사, 청송사, 영봉사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게 되었다.

동여비고에 나오는 청송사

앞서 사리탑을 언급했다. 유창의 <보우행장>, 권근의 <원증국사사리탑명>, 황유복・진경부 공저 <석보우전> 등에는 보우의 사리탑을 양산사, 사나사, 청송사(靑松寺), 태고암에 모셨다고 한다. 최근 용봉산(팔봉산)에 위치한 ‘홍성상하리미륵불(고려중기)’ 주변 사지에서 왕자명(王字名-려말선초양식)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동여비고」에 나타난 청송사 사역과 일치하며, 왕자명 기와<사진> 역시 이때까지 발견된 적 없는 특이한 양식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이다.

청송사지에서 발견된 王字名기와 편

당시 시대를 감안 할 때 기와에 어떤 양식으로든지 왕자(王字)를 새긴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며, 왕실과 연관되지 않은 일반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보우의 사리탑을 모셨다는 청송사가 확실시 된다. 앞으로 홍성군을 비롯한 관계기관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기록과 왕자명(王字名)기와를 통해 목(牧)의 시대를 열었던 보우를 홍주의 입장에서 정리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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