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근대유산 양림동 골목길 걷기 <1부>

- 시민과 함께 한 광주문화유산지킴이 2024년 세 번째 활동-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 희생과 나눔의 삶을 살아간 선교사의 발자취-

고경임 시민기자 승인 2024.03.11 06:56 | 최종 수정 2024.03.13 09:49 의견 0

2024년도 세 번째 활동으로 ‘광주문화유산지킴이‘는 시민참여자와 함께 40여 명이 양림동을 찾았다. 영하로 시작된 아침은 볕 잘 드는 양림동에 어울리게 해가 솟아오르자 따뜻한 봄날이 되었다. 이날 국가유산지킴이 활동은 양림동을 대표하는 근대유산인 우일선 선교사 사택에서 시작하였다.

◆ 1904년 광주에 들어온 선교사들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에는 남장로교가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들어왔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목포를 통해 나주를 거쳐 광주에 들어온 그들은 광주읍성 밖의 광주천 건너에 있는 양림 산턱에 정착했다. 그들은 구빈, 교육, 의료를 통해 일반인들의 교회에 대한 거리감을 줄이고, 기독교를 사람들에게 전도했다. 한국명이 배유지(裵裕祉)인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벨(1868~1925)과 한국명을 오원 또는 오기원이라 했던 클레멘트 오웬을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이 양림동으로 모여들면서 세칭 ‘서양촌’을 이루며 기독교 복음전파의 터전을 만들었다.

오웬의 이름을 빌어 지은 오웬 기념각에서는 일제의 감시에도 강연회, 가극대회 등 대중 행사가 열려 일제강점기에 지친 지역 주민들의 심신을 달래주었다. 선교사들은 우리나라 전통 집터 관념과 달리 언덕 위쪽에 집을 지었고, 캐나다 은단풍나무, 북미산 흑호도나무, 피칸나무, 포플러, 플라타너스 등 외래종 수목을 심었으며, 전도와 의료활동 등 여러 활동을 통해 지역 주민들에게 다가갔다.

◆ 광주광역시 기념물 우일선 선교사 사택

양림동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이다. 광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으로 제중병원(현 기독병원) 2대 원장을 역임한 우일선(R.M. Wilson: 1880~1963) 선교사의 사택이다.

1910년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1920년 화재로 소실된 후 증축하였다. 초기에는 음악감상회 등 사교장으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버림받거나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사택 앞마당에는 우일선 선교사가 고향에서 가져와 종자를 심은 것으로 전해진 은단풍나무가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고 아름드리 피칸나무, 흑호두나무 등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 가을이면 귀한 열매를 쉽게 볼 수 있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에서의 활동(사진 김낙현)

◆ 희생과 나눔, 사랑을 실천한 선교사들의 묘역

.우일선 선교사 사택 뒤쪽 언덕에 오르면 희생과 나눔, 사랑을 실천하며 한센병과 결핵치유, 빈민구제에 앞장섰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집단 묘역이 있다. 광주전남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하고, 개화의 물결과 일제치하에서 구국 운동의 계기를 마련했던 44인의 선교사들이 묻혀있다. 1904년 선교사들이 정착했던 양림동 일대는 백여시골로 불린 곳으로 몹쓸 병에 걸린 사람이 죽으면 거적에 싸서 버린 풍장터였다. 그곳에 선교사들은 집을 짓고 묘역을 조성한 것이다. 선교사 묘역을 오르는 양림산에는 선교사들의 이름을 딴 산책로가 조성돼 있으며, 선교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새긴 돌계단이 있다.

양림동산 선교사 묘역에서 (사진 고경임)

◆ 광주 근대문화운동의 요람지 오웬기념각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유산인 오웬기념각은 광주에서 순교한 오웬(ClementC. Owen: 1867~1909) 선교사와 그의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1914년 선교사 서로득이 설계하여 건립했다. 네덜란드식 회색벽돌 2층 건물로 평면 형태는 정방형이나 대각선상의 모서리에 위치한 설교단을 중심으로는 좌우대칭되는 것이 특징이다. 최대 1500명 수용 가능한 홀에는 독창적인 칸막이 시설이 있어 10개의 교실로 나눠 활용했다고 한다.

남녀 출입구(남자 왼쪽, 여자 오른쪽)가 따로 만들어진 점이 이채롭다.

개화기 초기 근대 광주의 문화전당으로서 근대 음악회, 오페라, 연극, 무용 등이 공연되었으며 1920년 광주 최초의 음악회인 ‘김필례 음악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1919년 3.1 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교회가 강제몰수 당하자 기념각에서 예배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자주 예배당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 <각시탈>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광주 문화전당의 요람 오웬기념관에서 <사진 박정세>

◆ 숭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

숭일학교는 유진벨이 1908년 2년제 소학교를 설립인가후 1910년 교사 준공하였다. 설립당시 최초 서양식건물이었으나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로 강제 폐쇄, 해방후 복교하였으나 1971년 운암동으로 이설, 그후 일곡동으로 이전한 숭일고등학교다. 영화감독 임권택씨가 이학교 출신이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무등파크 아파트 자리)

수피아 여학교는 유진벨이 1911년 회색벽돌 3층 교사를 세우고 수피아 홀이라 불렀으며 1927년 붉은색 건물 윈스브로우홀 추가 건립 현재 수피아여중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쇄. 학교건물이 비었던 1941~1944년까지 광주상업실업학교건물로 이용하였고 1944년 5월에는 광주의학전문학교(전남대 의대 전신)가 개교하였고, 해방후 수피아 여학교로 재개교하였다. 1951년 수피아여중과 여고로 분리되고 1967년 이학교 재단인 호남기독학원은 수피아 간호학교(현 기독병원 간호대학). 1971년에 수피아 전문학교 (현 광주보건대학)등을 설립했다

◆ 수피아 여학교에 남은 문화유산

광주지역 개신교 선교의 근거지이자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손꼽히는 수피아여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수피아홀은 국가등록문화유산이다. 미국 스턴스 여사(Mrs. M. L. Sterns)가 세상을 떠난 동생 제니 수피아(Jennie Speer)를 추모하기 위해 기증한 헌금으로 1911년 건립되었다. 평면구조와 건물배치가 실용적이며 교육 및 종교적으로 가치가 있는 건물로 평가받는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인 커티스 메모리얼 홀은 1925년에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한 전라도 지역 선교의 개척가인 유진벨(배유지) 목사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정면에서 보면 1층건물로 보이나 실제로는 2층건물로 1층은 선교부 아동학교 2층은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중앙을 기점으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원형 창과 첨두아치 형상의 창문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아름답다. 적설을 고려한 급경사 지붕형태, 주변경관을 최대한 이용한 배치계획, 검소하면서도 부족함이 없이 의장 등 규모는 작지만 변화가 풍부한 건축기법이 우수하여 양림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다.

윈스브로우 홀도 국가등록문화재로 1927년 일제의 지정학교 선정기준에 맞추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미국장로회의 윈스보로우(Winsborough) 여사의 기부금과 선교사 서로득(Martin L. Swinehart)의 설계로 지어졌다. 지하 1층~지상 2층 규모로 정면 출입구의 포치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지붕골조 등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는 수피아여자중학교 교사(校舍)로 쓰이고 있다.

광주광역시 문화유산자료인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소강당은 광주 근대사학의 효시인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가 당시 학교 인가를 목적으로 1928년에 신축한 소강당으로 광주에 남아 있는 체육시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1945년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교사(校舍)로 사용한 바 있다. 붉은 벽돌로 건축되었으며, 독특한 박공지붕(지붕면이 양쪽 방향으로 경사진 ㅅ자 모양의 지붕), 왕대공 트러스(큰 외부하중을 지지하는, 긴 기둥간격을 가진 구조물)인 산형구조물의 중앙에 수직재가 있는 구조물 등은 당시의 건축 양식과 기술을 후세에 전하는 중요한 건축물로서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수피아 여학교에 남아있는 문화유산들

◆ 양림동 골목 걷기는 계속된다

시민과 함께한 양림동 근대유산 이야기가 있는 플로킹은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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