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130주년 발자취를 찾아서 <1부>

- 전주, 정읍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 발자취를 찾아가다
-고부에서 혁명의 불꽃이 피어나다

고경임 시민기자 승인 2024.11.11 06:50 의견 0
전라감영 선화당에서<사진 박정세>

광주문화유산지킴이‘는 매년 두 차례 문화답사를 떠난다. 올해 하반기에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아 전주감영,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봉준 유적, 동학농민군 최초 승전지인 황토현 전적지를 둘러보았다. 이번 답사는 광주문화유산지킴이 회원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깊이 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정읍천과 동진강 드물머리에 만석보를 건설했던 곳


◆ 1894년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으며, 1892년에서 1893년까지 동학 교단의 조직적인 교조신원운동과 1894년 1월 고부 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하여 3월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시작되었다.

갑오동학혁명 기넘탑 앞

◆ 동학사상과 전국적 조직이던 동학 교단을 매개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항쟁으로, 대규모 농민 대중에 의한 혁명이었다.

동학농민운동 최초 집결지인 말목장터 감나무(왼쪽은 태풍으로 쓰러진 감나무 오른쪽은 후계목)

◆ 일본의 침략 야욕과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왕실의 외세 의존, 그리고 보수 유생의 체제 수호의 벽에 좌절하였으나,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항쟁, 3·1 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회개혁 운동과 자주적 국권 수호운동으로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 민중운동의 근간이 된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변화시키고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을미의병 활동, 3·1 운동,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모태로서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의 지평을 연 근대 민족사의 대사건이었다.

전봉준 장군 고택에서

◆ 고부농민봉기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각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이 넘는 돈을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보를 축조한다며 농민들을 강제동원하여 쌓고 가을에 수세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893년 흉년이 들어 11월 40여 명의 농민이 고부 관아로 몰려가 만석보 수세 감면을 진정하였으나 조병갑은 오히려 양민을 선동하는 난민이라 하여 몇 명을 구금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봉준 등 20여 명은 송두호의 집에 모여 조병갑의 탐관오리를 차단하고 전주성을 함락한 후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거사를 계획(사발통문: 사발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서명)하여 결의하였으나 조병갑이 익산으로 발령이 나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부임하자 1월 10일 베들평야(이평) 주변 10여 마을 농악대와 함께 농민들이 예동마을(말목장터)에 모여 고부관아를 점령하였으나 조병갑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새로 부임해 온 군수 박원명이 적극적인 회유책을 세우고 폐단 시정을 약속하며 해산을 권유하자 전봉준은 마지못해 해산하였다.

광주문화유산지킴이 회원들도 사발통문을 만들다<사진 고경임>

사발통문 행동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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