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둘러싸인 강화도의 자연과 사람들의 역사
윤명철
두어 주일에 한 번, 때로는 달포에 한 번 정도는 밟아보는 곳, 그 터를 생각해본다. 지문을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급하게 여울처럼 물길이 흘러가는 곳, 보름달이 도도한 눈빛을 새파랗게 뿜어낼 때도 바다안개가 스물스물 비웃음을 날리는 듯한 분위기의 밤, 물이 썰면 드러나는 수 십 리의 걸친 갯뻘들이 식탐하듯 구멍들을 벌리는 곳,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생각해본다. 얼핏 보면 반쯤은 뭍이고 반쯤은 바다인 섬에 사는 애매모호한 사람들 같고, 역사의 중심부이면서도 꼭 변두리 쯤에 사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때로는 인진쑥처럼 해풍에 절은 진짜 뱃사람들 같아 보이지만, 민물을 넘나드는 숭어나 참게처럼 서울이나 인천의 곁불에 벌겋게 단 사람들로 보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길고도 긴 역사에서 강화도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적지 않은 기간 동안은 역사의 한 중심부 역할을 담당하면서 때로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한 가운데에 있기도 하였다.
그러면 강화도는 왜, 어떻게 해서 그러한 남다른 역사적인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을까?
원래부터 이곳에서 산 사람들도 드문드문 섞여 있겠지만, 대부분은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인데, 대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들어(入島)와서, 어떻게 서로 의 살과 마음들을 섞어가며 살았을까? 이 의미있는 위치에서 절묘하고 복잡한 환경과 더불어 가면서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왔을까?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인간은 놓여진 환경, 주어진 조건에 따라 적지 않은 영향을 받으며 삶을 꾸려간다. 지금도 그러한 면이 있지만 전근대 시대에는 갖가지 자연환경의 영향을 음으로 양으로 받으면서,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인다.
강화도는 사람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육지가 아니라 섬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이나 해양과 만나는 위치에 있으므로 자연환경이라는 틀 안에서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강화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엮어낸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사와 함께 우선 그러한 모든 것들을 포함한 더 큰 단위인 자연, 그리고 강화도 주변지역이나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라는 더 큰 틀 속에서 그 윤곽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정작 본인들은 모르거나 영원히 깨닫지 못한 다 해도 결국은 크고 넓은 단위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아시아라고 부르는 지역을 통념을 버린 채 있는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가 있고, 그 터를 중심축으로 일본열도와의 사이에는 동해와 남해가 있고, 대륙의 일부분을 차지한 중국과의 사이에는 황해라는 內海(inland sea)가 있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부와 일본열도의 서부, 그리고 중국의 남부지역(양자강 이남을 통상 남부지역으로 한다)은 이른바 동중국해를 매개로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연해주 는 타타르해협을 통해서 사할린 및 홋카이도와 연결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동아시아는 비록 유럽에 있는 지중해처럼 거의 사방이 육지로 꽉 막힌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이른바 多國間 地中海海(multinational-mediterranean-sea)의 형태이다. 그러다 보니 동아시아는 바다와 육지가 제각각 다르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늘 모든 방면에서 만나면서 역사를 이루어왔다. 이른바 해륙적 환경을 지닌 지역이다.
특히 황해는 중국과 한반도의 서부해안 전체, 그리고 만주남부의 요동지방을 하나로 연결하고 隣接한 나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고 활동하는 場이다. 바람이나 해류, 조류 그리고 지역 간의 거리 등을 감안하면 너무나 쉽게 서로 만날 수 있는 환경이다. 지중해 가운데에서도 또 하나의 내해이다. 그 황해 가운데에서도 지리적으로도나 역사적인 경험으로 보아, 그리고 여러갈래로 뻗친 항로 등 실질적인 해양환경등으로 보아 가장 의미있는 역학관계의 核이고, 수천 년 동안 실제로 힘의 충돌과 각축전이 벌어졌던 곳이 경기만이다.
이미 머언 옛날인 신석기 시대부터 경기만은 정치적으로 교섭을 하거나, 공무역을 비롯한 각종 무역, 크고 작은 군사작전을 막론하고 번다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해양교통의 길목이었다. 일본열도의 큐슈지역을 출발하면 한반도 남부의 여러 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거쳐 압록강 하구의 해역과 요동반도 남단의 바다를 경유하여 산동반도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남북연근해항로가 있었는데, 그 항로의 실질적인 중간깃점이 경기도 였다. 또한 동시에 한반도의 중간 지역들과 산동반도의 끝단을 잇는 동서횡단항로와 마주치는 곳도 경기만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국제적인 해양교통의 結節点이었다. 거기다가 한반도 서안의 근해항로나 연안항로를 이용해서 남북을 오고갈 때는 반드시 거쳐 가거나, 그 영향권을 통과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따라서 당연한 결과지만 한민족 내부에서는 물론이지만 국제적으로도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보다 유리한 항로를 둘러싸고 쟁탈전이 심각하게 일어나면서 모든 힘이 모여들고 조정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기만은 우리 스스로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반도 최대의 강이고 물길인 한강과 만나는 곳이었다. 역사에서는 ‘帶水’ ‘漢水’ ‘阿利水(광개토대왕릉비)’등으로 불리워졌던 한강은 백두대간의 한 척추에 해당하는 설악산 오대산 등에서 출발한 물줄기이다. 이 물줄길들은 비록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내려오지만 경기도의 양수리에서 만날 때까지 한반도 중부의 거의 모든 지역과 연결되면서 흐르고 있다. 합수된 한강은 김포반도의 입구에서 연천, 파주 등 경기 이북지역을 적시며 흘러온 임진강과 만나 수량이 많아진다. 그 다음에 강화도로 흘러 들어와 다시 황해도 지역을 아우르며 특히 개성과 이어진 예성강을 만나 강화도 북부에서 최종적으로 합류하여 흐르다 서해로 빠져 나간다. 이렇게 중요한 강이므로 많은 나라와 사람들이 주변에 거주하면서 성장했다. 따라서 만약에 정치적인 야심을 가진 세력들이 물목에 해당하는 경기만을 장악하면 거꾸로 그물처럼 뻗은 하계망을 이용하여 한반도 중부지역을 통합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우리하고 쓸모있는 환경 때문에 경기만은 지정학적, 지경학적, 지문화적 입장에서 보아서 요충지 가운데 요충지였다. 그 경기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넓은 곳이 바로 강화도와 주변의 해역이다.
2 강화도의 자연환경과 해양전략적 가치
강화도는 경기만 가운데에서 한강과 예성강이 바다와 만나 만들어진 넓은 만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최대의 만이고 핵심지역이다. 현재 서울의 인후지처, 즉 목구멍과 같은 곳이었다.
강화도는 비교적 넓은 편이다. 크기는 남북이 28km 동서가 16km 주위가 112km에 달하며, 그밖에 섬들까지 합하면 해양면적은 더욱 늘어난다. 섬의 내부에는 육지의 지형이 이어져서인지 穴口山․摩尼山․大母山․鎭江山․別立山․高麗山 등 해발이 400m 이상이나 되는 비교적 큰 산들이 전체를 산처럼 보이게 한다.
동으로는 강화수로(鹽河, 急水門)라는 매우 좁고 조수의 흐름이 불규칙한 협수로를 사이에 둔채 김포반도의 문수산성 등이 있는 通津 지역과 아래의 대곶 지역과 만난다. 남으로는 인천광역시인 영종도를 비롯한 도서지역, 서쪽으로는 교동도와 섬들이 점점이 바다 쪽으로 이어지면서 연평군도와 백령도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쪽은 예성강구와 만나는 넓은 만으로 건너편에 연안군․白川郡의 여러 지역과 만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보면 육지나 다름없는 강화도를 사실상 섬으로 만들어놓고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강화도호부는 ‘바다 섬 가운데 있는데, 동으로 갑곶나루까지 10리, 남으로 해안까지 40리, 서쪽으로 인화석진까지 26리, 북으로 승천부진까지 15리, 서울과의 거리는 135리.’라고 하였다. 확실하게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에는 크고 작은 무수한 새끼섬들이 있고, 황해안의 특성을 잘 반영하면서 갯뻘이 너무나 잘 발달되었다.거기에 리아스식 해안이라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므로 상대적으로 곶과 포들이 곳곳에 있었다.
강화해역은 경기도의 서쪽 지역과 옛 경기도의 일부인 개성 남쪽의 豊德과 甕津․海州 등 황해도의 남부해안 일대와 마주치는 북부 경기만의 입구를 꽉 채우고 있다. 물길이 동서남북의 4군데에서 모여들고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므로 조류의 흐름이 불규칙하여 항해하기에 매우 힘들다. 특히 김포반도와 강화도 사이의 수로는 매우 협소한데다가 중간에 뻘지대가 형성되어 배들이 드나들기가 매우 힘들뿐 더러 수로 중간에 암초가 있고, 물길이 복잡하여 항로로 활용하는 면이 적었다. 특히 손돌목은 물길이 뱅글뱅글 도는 곳이라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병와집에는 이러한 귀절이 있다. “강화는 거대한 진으로 바다의 문이 되어 있고, 육지와는 접해있지 않으며, 부의 북쪽에는 뱃길이 통하지만 단지 물이 너무 넓어서 혹시 풍랑이라도 만나서 막히면 건널 수가 없고, 조강에 배를 매어두어야만 한다.”
그래서 강화도는 섬전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방어체제라고 할 만큼 중요하고, 곳곳이 전술적으로 효용가치가 크다. 역사적으로 국방상의 요충지였으므로 전 시대를 통하여 방어시설이 구축되었다. 섬에는 곳곳에 많은 鎭과 墩臺 城 堡들이 있는데 현재로서는 이들 방어체제들을 고려 이후에 축성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조사가 진행된 몇몇 지역들과 방어체제들을 보면 이미 삼국시대에도 그러한 기능을 하였음을 알려주는 흔적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독특한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곳곳에서 해양세력이 발호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더구나 적당한 크기로 인하여 고대 이전에는 독립된 소국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지중해의 크레타섬 등을 비롯한 해양폴리스들의 크기와 비교하면 매우 재미있다.
물론 중앙집권화된 고대국가가 성립이 된 후에도 지역의 특성으로 보아 중앙정부의 통제가 비교적 느슨할 수밖에 없는 지역세력이 존재했을 것이다. 강화도는 이렇게 육지로서 뿐만 아니라 섬으로서 해양지리적인 잇점이 많이 있으므로 역사에서 소외된 변방이 아니라 일찍부터 동아시아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특히나 우리역사에서는 늘 중심부의 역할을 하였다.
역사
머언 옛날, 역사시대 이전에도 먼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데는 육지의 도로보다는 바다의 뱃길이 더욱 빈번하게 애용되었다. 경기만이 일찍부터 역사의 중심이 되고, 또 다른 지역과 교류가 활발한 것은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강화도에는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특히 서해 연안항로나 근해항로가 이용되면서 강화도는 중요한 해양거점으로서 여러지역의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하고, 문화를 전달하는 기능도 했다. 하점면의 삼거리에는 신석기시대의 주거지가 있었고, 여러 곳에는 신석기시대의 패총 등이 있다. 어쩌면 현재의 서울을 비롯한 내륙보다 훨씬 사람들이 많이 사는 번다한 장소였을 것이다. 이어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지석묘와 주거지 등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주민들은 바다를 타고 만주나 요동 또는 바다건너 산동 등 중국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특히 고조선 문화의 특징인 고인돌은 하점면을 비롯하여 대규모의 분포지가 여러곳에 있다. 강력한 정치세력이 웅거하였고, 이들은 어떠나 형태로든 고조선과 연관을 맺었다.
바닷가의 마리산(摩尼山)에는 제천단 등 단군과 관련된 역사의 흔적들이 있다.
吉祥面의 溫水里에는 삼랑성이라 불리우는 鼎足山城이 있다. 高麗史 地理誌 강화현조에도 ‘一名 三郞城’ 이라고 되어 있다. 언제 이 성이 쌓아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檀紀 67년에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삼랑이라는 신하를 시켜서 쌓았다는 설도 있다.이 성을 世宗實錄地理誌에는 신라와 고구려 이전에 쌓았다고 했다. 강화도는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해양전략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남부와 북부, 중국지역을 이어주는 항로가 있었다. 대동강의 하구 유역이 고조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이 지역은 당연하게 고조선 사람들이 활동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고조선의 핵심에서 정치적으로 큰 격변이 발생하거나 다른 나라의 공격을 받다 위기에 처했을때 남으로 내려왔다. 또 중국 지역 내에서도 정치적인 변동이 일어나면 바다를 건너 사람들이 이동하였다. 그들은 토착민들과 만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또 정치세력을 결성했을 것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들은 익숙한 해양활동과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자연스럽게 황해전체와 남해를 거쳐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거대한 활동권, 무역권이 형성되는 단초를 열어놓았다. 그리고 이 자연스러운 무역로는 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보다 조직적이고 목적이 분명한 국제적인 항로로 확대 개설되어 정치적인 교류까지 가능하게 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 따르면 조선(위만조선 이전)의 마지막 왕인 準왕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이주하여 韓王이 되었다. 이때 그 일행이 사용한 항로는 남북연근해항로서 중간에 있는 경기만을 경유하거나, 어쩌면 최종도착지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또 그 후에는 조선상(朝鮮相)인 역계경(歷谿卿)이 (위만조선의 왕인)우거에 반하여 2,000여 호의 백성을 데리고 진국(辰國)으로 망명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록은 기원 전 2세기 경의 상황을 말한 것인데, 이 또한 먼저와 마찬가지로 연근해항로를 사용하면서 경기만에 도착하였거나 경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몇몇 기록들을 통해 유추해보면 위만조선은 중국을 통일한 漢과 교섭을 가졌으며, 남으로는 삼한의 78개 소국들 가운데 몇몇 소국들과 교섭과 교역을 한 듯하다. 삼한의 소국들 가운데 大石索國은 강화도이며, 小石索國은 강화의 교동도로 추정하고 있다. 아마도 이 소국들은 김포를 비롯한 주변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나 소국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강화는 백제가 건국하면서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의 정치나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백제는 강화도를 행정구역상 甲比古次大東地志 권2 개성 강화부
라고 불렀다. 김포에서 강화로 건너가 도착하는 곳을 갑곶나루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갑비고차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백제는 영토가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 서부해안을 갖고 있다는 지정학적인 조건 때문에 존속한 기간 내내 해양과 관련이 깊었다. 또한 건국과 관련된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출발부터 경기만의 해양 및 한강하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유리태자를 피해 어머니인 소서노와 함께 卒本扶餘를 출발한 沸流와 溫祖집단은 선단을 구성하여 연근해항해를 하다가(필요에 따라서는 연안항해도 병행하였을 것이다.) 도중에 몇 군데에 상륙하였을 것이다. 南航하던 그들은 필시 낙랑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을 대동강 하구유역을 멀리서 우회하였을 것이다. 그 다음에 경기만의 가장 한 지점으로 상륙하였을 것이다. 동생인 온조는 처음 정착한 하북 위례성에서 한강을 도강하여 하남위례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는 한강수계를 통해서 강화도를 거쳐 바다와 이어지는 일종의 河港도시였다. 비류는 경기만의 한 가운데인 인천만에 정착하여 彌鄒忽에 수도를 정했는데, 이는 일종의 海港도시였다. 한편 古爾王 때에는 서해대도에서 사슴사냥을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 큰 섬이 어느곳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었으나, 여러 조건들을 고려하면 강화도가 가장 타당성이 높다.
그렇다면 백제는 강화도를 대외교섭의 전진기지로 삼은 것이다. 해로를 이용해서 북으로 낙랑을 치고, 대방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강력한 국가로서 발돋움했고, 중국지역과는 역을 벌였다. 4세기에 이르러 근초고왕은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고구려와 경쟁을 벌였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백제는 황해를 마음 놓고 건너다니며 양자강 하구인 建康(현 南京)에 수도를 둔 동진과 교섭하였다. 이때 강화도는 백제 해양진출의 전진기지로서 또는 수군함대 사령부가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서울을 비롯한 한강유역 근처에서 그 무렵의 서진이나 동진에서 생산된 도자기를 비롯한 유물들이 발견됐다. 그만큼 교류가 활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강 하구와 강화도가 있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다.
백제의 뒤를 이어 강화도를 활용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나라를 세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부터 이미 해양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압록강을 비롯한 강에서는 물론이고, 두만강 하구, 동해 그리고 압록강 하구를 비롯한 황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4세기에 들어서 거지왕자로 알려진 미천왕이 그 동안에 벌어졌던 공방전에 마치내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압록강의 하구와 대동강 하구의 出海權을 확보했다. 뒤이어 고국원왕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백제를 본격적으로 공격하는 등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하지만 결국은 평양성 공방전 때 백제군의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광개토태왕이 등극하였다. 그는 북방종족과는 한편으로는 전쟁을, 한편으로는 화친책을 구사하였으나 남쪽으로는 매우 적극적이라고 부를만치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태왕은 즉위하자마자 백제를 공격하여, 396년에는 백제군의 최전방기지이자 수군함대사령부였던 關彌城을 함락시켰다. 관미성의 위치를 놓고 많은 주장들이 있다. 초기에는 주로 강화도라는 설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경기도 파주의 임진강 하구인 오두산성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에 국내외적으로 전개된 정치적인 상황과 몇몇 해양환경들을 고려한다면 강화도의 봉천산 지역일 가능성이 크다.
이어 태왕은 396년에 대규모의 수군을 투입하여 백제의 왕성을 비롯하여 58성과 700 촌을 탈취하였다. 기병과 수군을 활용하여 선제공격을 시도하고 협공을 하는 수륙양면작전을 구사하였다. 이 때는 沸城(김포반도의 통진), 阿旦城(서울의 아차산성), 彌鄒城(인천), 牟盧城(용인) 등이 점령된 것으로 보아 수군은 3개 방향으로 상륙했던 것 같다. 첫째는, 대동강유역에서 출발하여 예성강 하구와 한강이 만나는 강화북부에서 한강하류를 거슬러 오면서 김포반도와 수도를 직공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한성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남양만으로 상륙하여 수원, 용인을 거쳐 한성의 배후를 치는 것이다. 이때 1로와 2로의 일부는 강화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강화도를 통과하여 한강 하구를 거슬러 올라갔고, 2로군은 강화도의 해안을 거쳐 김포반도의 해안에 상륙작전을 시도하는 한편 인천만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서해안, 경기만의 해상권 장악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광개토대왕의 수군작전은 경기만의 入出口였던 강화도가 핵심이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광개토태왕은 영토를 확장하고 농경지를 확보한다는 기본적인 동기 외에 동아시아의 질서재편을 주도하려는 좀 더 복합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추진된 것이다. 이른바 동아지중해 중핵국가로서 받돋음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뒤를 이어 등장한 장수왕은 선왕의 뜻을 충실하게 이어받아 성공시킨 인물이다.
그는 평양으로 천도하고 475년에 한성을 전면적으로 공격하여 경기만을 장악하였다.
이 후 강화도는 고구려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혈구군(穴口郡)이라는 의미깊은 이름의 군을 설치하고, 속현으로 首知縣, 冬奈音縣, 高木根縣(교동도) 등을 두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곳곳에 고구려와 관련된 지명과 전설 등이 많이 있다. 하점면 삼거리에 있는 고려산에는 장수왕의 명을 받은 천축대사가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연꽃을 날려 떨어진 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靑蓮寺 紅蓮寺 白蓮寺 黃蓮寺 黑蓮寺 등을 세워 오련산이라고 하였다. 고려산의 정상에는 馳馬臺가 있고, 연개소문의 훈련도장이 있으며, 내부에는 五井이란 우물이 있는데, 연개소문이 말에게 물을 먹이던 곳이라고 한다. 연개소문의 집터로 알려져 있는 장소를 방문해 조사해보았으나 현재로서는 시대를 알 수 없는 주초석 외에는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 위치로 보아 해안을 관측하기에 좋은 곳이고, 터가 넓었을 뿐이다. 그 외에 혈구산성 같은 성들도 고구려와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이 후 신라는 551년에 제 2차 나제동맹을 체결시키면서 한강하류유역을 탈취하였다.
이제 강화도를 비롯한 한강유역과 경기만은 독자적으로 황해를 건너 중국세력들과 교섭을 하면서 국제질서의 무대로 등장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신라는 강화도를 비롯한 곳곳에 수군기지를 두어 수군함대를 양성하였고, 필요에 따라서는 해양작전을 실시하였을 것이다. 660년 여름 소정방의 군대가 백제를 급습할 목적으로 바다를 건너올 때에 태자인 김법민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덕적도에서 마중을 하였다. 이어 당군을 안내하면서 금강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면서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신라수군이 있을 만한 곳은 현재 강화도 해역일대와 남양반도 당성 주변의 해역이었을 것이다.
신라는 671년 10월에 당의 漕船 70여척을 격파하였고, 673년에는 문무왕이 徹川을 파견하여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신라의 수군함대가 경기만에 있었음을 반증한다. 또한 673년에는 임진강의 瓠瀘河 전투와 한강의 王逢河 전투를 벌이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한강 하구와 강화도 해역이 주요한 전장이었으며, 신라가 해양활동을 벌이는 중요한 본거지였음을 말해준다.
그 후 경덕왕은 혈구를 海口라고 고쳤으며, 首知縣은 首鎭, 冬奈音縣은 江陰縣, 高木根縣은 喬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훗날 元聖王은 청해진 당성진에 이어 이곳에 穴口鎭을 설치하였다. 이는 북방방어의 기능도 있었지만 청해진, 당성진 등과 마찬가지로 해적을 방어하고, 지방에서 해양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제어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다.
신라와 당나라 간에 교역을 할 때 경기만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초기단계에는 신라와 공식적으로 교섭을 벌이는 창구가 산동반도의 북부해안인 등주(지금의 봉래시)에 있었으므로 강화도를 비롯하여 경기만의 여러지역을 출발항구로 활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점차 당나라의 남쪽 지역과도 교섭을 하고, 재당 신라인등 민간인들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경기만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위치로 전락했다. 반면에 해상호족들이 성장하였다.
장보고가 활약했던 바로 그 무렵에 경기만에는 왕건의 선대인 작제건이라는 인물이 활약하고 있었다. 김관의가 지었다는 편년통록에는 작제건에 관하여 재미있는,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듯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제건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다가 16세 되던 해에 상선을 타고 중국으로 거너가다 도중에 서해룡을 구해준 댓가로 딸을 아내로 얻고, 재물과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白州(배천)의 劉相晞 등이 개주․정주․염주․배주 등 4개 주와 江華․喬桐․河陰 삼현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영안성과 궁실을 쌓았다. 그들의 아들인 용건은 몽부인과 결혼하였으며, 그 아들이 바로 왕건이다. 결국 작제건은 경기만의 해상토호이며 즉 범강화해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것이다. 물론 주변의 파주 등 임진강 하류, 풍덕 및 행주, 孔巖(현재 강서구 가양동 방화동 일대) 黔浦(김포시, 검단면 일대) 등의 한강 하류 세력들도 다 이들과 연관되었을 것이다.
통일 신라는 말기에 들어서면서 지방호족들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 해양호족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왕건은 강화해역을 근거지로 삼아 범경기만세력을 규합하고 이어 영산강 하구의 서남해안 해양세력을 묶었고, 후백제의 견훤은 금강하구와 섬진강 하구의 해양세력을 하나로 엮어낸 또 다른 형태의 해양세력이었다. 이러한 해양세력들 간의 대결구도에서 결국은 경기만 해양세력이 승리를 거두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신 해양시대가 도래하면서, 황해북부가 중요해지고, 자연스럽게 경기만은 역사의 중심부로 부상할 조건이 구비되었다.
왕건은 아직 궁예의 휘하에 있을때인 903년 3월에, 대규모의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를 내려가 나주지역을 점령하였고, 인근의 10여 군현을 빼앗았다. 그는 백선장군이었고, 해군대장이라는 칭호에서 나타나듯 전형적인 수군장군이었다. 이어 909년에는 후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나주를 지켰다. 또한 910년에 70여 척의 배에 2000여 명씩 싣고 후백제를 원정하기도 하였다. 강화해역의 선단을 활용한 것이다. 한편 932년에 후백제의 수군이 예성강에 침입하여 왕건가의 핵심거점인 鹽, 白, 貞 3주의 선박 1백 척을 불사르고, 猪山島의 목마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이어 10월에는 海將軍 尙哀를 보내 大牛島 등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6년 간 海路가 막혔다 한다. 결국 강화도 해역에서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미 해양력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그 중심에서 강화도가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간파한 왕건 등 초기 세력들은 강화를 비중있게 다루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는 강화를 고려초에는 冽口縣이라고 불렀다고 기술하였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해양력은 국제환경을 극복해 가는 유용한 도구이었다.
고려와 송나라는 해양을 통하여 외교 및 교역을 하였는데, 이는 고려사회 및 동아시아의 질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약 160여년 동안 고려는 송나라에 57번의, 송은 고려에 30번의 사신을 보냈다. 평균 2년에 1번 꼴로 빈번하게 사신단이 오고 갔다. 물론 고려와 송나라의 교섭은 해양을 매개로 하였으며, 모두 강화도를 통과하거나 종착지로 삼았다.
강화도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의 입출처로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긴요한 역할을 하였다. 登州(봉래) 靑州(산동) 密州(산동의 膠縣) 등과 이어지는 황해중부의 동서횡단항로가 사용되고, 일본열도와 유구(오끼나와) 등으로 이어지는 남북연근해항로, 현재의 강소성 지역과 이어지는 황해남부 사단항로, 현재의 절강성 지역인 항주 영파 등과 이어지는 동중국해 사단항로는 모두 이 경기만의 강화해역을 활용하였다. 강화도는 수도의 외항 역할을 하는 모든 物流와 文流의 로타리였다.
고려와 송나라는 초기의 한 때와 금나라가 건국한 후를 제외하고는 엄청난 규모의 공무역을 했다. 보통 100명에서 300명을 태운 사신선들은 곧 공무역선이었다.
하지만 민간무역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발달하였다. 북송 시대 전기(1017-1090년)에만 약 100명 이상의 송 상인들이 고려에 온 기록이 있다. 아랍인인 서역상인들도 많이 왔다. 현종 때인 1024년에는 대식국(현재의 이란 및 아라비아지방)의 상인이 100여명이나 한 번에 온 적도 있었다. 이어 다음해인 1025년과 그 후 1040년에도 대거 왔다. 이외에도 마팔국(인도), 삼라곡국(태국), 교지국(베트남) 등의 국가들과도 교역을 하였다.수도인 개성은 다양한 인종과 물건들이 모여드는 동아지중해의 유명한 국제도시였고, 강화도는 그 바로 앞의 외항구실을 하였다. 당연히 강화도에는 외국인들이 거주하였고,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무역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강화도는 다시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의 중심부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몽골과 전쟁을 벌이면서 수도의 역할을 하게된 것이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받자 일단 1232년 1월에 항복을 하여 위기를 모면한 후에 실권자인 崔瑀의 의중이 반영되어 천도가 결정되었다. 강화는 전술적으로 몽고군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매우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水戰에 약한 몽골의 침입을 방어하려면 장기항전을 할 수 있는 최적지였던 것이다. 좁은 강화수로를 사이에 두고 육지에 가까운 반면에 조석간만의 차가 매우 크고, 주변지역의 潮流가 매우 복잡해서 외부세력이 쉽게 근접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실제로 몽고군은 배를 만들어 공격하려다 해로를 모른데다가 험하기 때문에 결국은 배를 불태운 채 물러난 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수도의 모습을 갖추면서 궁궐을 비롯하여 내성과 해안가에 외성들을 축조하였다.
이 시기 강화는 정치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학문과 예술 등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지금껏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들은 강화사람들의 정서와 기질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려는 굽히지 않고 항전을 하였지만 도중에 1258년 최의가 죽고 마침내 무신정치는 끝이 났다. 고려정부는 1270년 5월에 수도를 개경으로 옮기고 삼별초에게 해산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삼별초는 강화를 떠나 진도에 들어가 거점으로 삼았다. 당시 삼별초군이 강도정부를 떠나는 광경이 고려사절요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배를 모아 공사(公私)의 재물과 자녀들을 모두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구포(仇浦)로부터 항파강(缸破江)까지 배머리와 꼬리가 서로 접하여 무려 1천여 척이나 되었다.” (《고려사절요》18, 원종 11년 6월)
강화도는 다시 개경의 입구에 해당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이는 조선이 건국하고나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은 수도를 한양에 정하고 한강하구를 이용하여 바다로 나갔다. 대외적으로 교류가 거의 없어서 강화도는 국제정치나 무역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지는 못하였고, 때때로 유배지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세금을 거두워서 수도로 운반하는 조운시스템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호남을 비롯하여 충청도 등지에서 수납되는 대동미는 조운선에 실려 서해안과 한강하류를 통하여 한양으로 운송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강화도는 다시금 국제정치의 중요한 무대로 떠올랐고, 우리민족의 불행이 시작되는 첫장소가 되었다. 1866년인 병인년에 프랑스군은 영종도 근처 忽溜島에 나타났으며, 2척은 강하해협을 통과한 후에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양화진까지 갔었다. 그 후 다시 9월에는 강화도 甲串鎭에 상륙하였으며, 정족산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는데, 조선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다. 신미양요 때도 미군은 이 수로로 들어와 수심을 측량하였으며, 조선군과 포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근처인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 등에서 전투를 벌였다. 신미양요를 거쳐 1875년에 운양호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개항을 거부하는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기 위해 9월에 운양호 등 군함 3척을 파견하여 강화 앞바다에서 함포를 발사한 사건이다. 그 후 조선은 일본에 합병 당하였고, 강화도는 다른 의미에서 역사의 주변부가 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냉전 구도가 정착되면서 한강하류와 강화만 해역은 세계에서 가장 단단하게 얼어붙은 곳이었다. 북한의 황해남도, 경기도 고양, 파주, 김포 그리고 강화도가 만나는 하류지역은 양 지역의 어떠한 선박이나 사람도 통항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한강하류는 간첩이 오고가는 치안지역이었다. 하지만 이제 열린 질서, 공존의 질서, 평화구도를 지향하면서 강화도의 위상과 역할은 변화하고 있다. 한강하구와 강화도를 통해서 세계로 나갈 수 있고, 모든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 곳에 평화가 깃들면 동아시아가 평화로워지고, 이곳이 열려 있으면 동아시아의 전 지역이 열린다. 일종의 평화지역(PEACE ZONE)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강화도는 역사의 중심부로 부각하고 있다. 더구나 경기만이 특구지역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강화도의 또 다른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지금 강화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애정을 뿌려가며 강화도의 역할을 새롭게 부각시키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방식은 같지 않고, 때로는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지나간 역사의 궤적을 찾아내는 사람들도 있고, 동아시아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과거와 미래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다소 혼란스러운 정체성 때문일까? 아니면 복잡하기 그지없었던 역사 때문일까?
잘 모르겠지만 강화와 연관된 부분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로서, 또 틈나면 찾아가서 훑어보면서 짠내음을 맡아보는 근처 김포사람으로 몇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들은 우리 역사의 핵에 거주하는 사람들답게 자존심이 강하고 기가 찬 사람들이다. 바다와 육지와 강물이 만나는 복합적인 곳에 살면서 지금은 적지않게 잃어버렸지만 생물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유전적으로 열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다. 또 강도정부 시절에 그 처절한 고립감을 극복하고 인고의 세월을 견딘 경험으로 똘똘 뭉쳐 생활력이 강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금은 자의건 타의건 간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만 하는 역사적인 숙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강화도.
인재들의 후예가 사는 섬, 그리고 미래의 인재가 살아가고 있는 섬이 아닌가?
저자 약력
윤명철(尹明喆) ymc0407@yahoo.co.kr
역사학박사
고구려및 동아시아 해양사 전공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