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지중해에서 본 강화도의 위상 , 역사에서 미래로
윤명철 동국대 교수
1. 동아지중해와 경기만의 해양역사적 배경
동아시아는 육지로만 구성된 내륙지역이 아니다. 초원 사막 대평원처럼 이른바 ‘地中地’의 질서가 아니다. 또한 남태평양의 도서들처럼 완벽하게 바다로만 둘러싸인 ‘海中地’의 환경도 아니다. 긴 線과 넓은 面積으로 大陸과 海洋이라는 두 자연환경이 만나면서 동시에 작동되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海陸的 環境을 지닌 세계로서 지중해적인 형태와 성격을 띄고 있다. 특히 韓半島를 中心軸으로 日本列島 사이에는 東海와 南海가 있고, 중국 사이에는 黃海라는 內海(inland-sea)가 있다. 한반도의 남부와 일본열도의 서부, 그리고 중국의 남부지역(揚子江 이남을 통상 남부지역으로 한다)은 이른바 동중국해를 매개로 연결된다. 그리고 현재 沿海洲 및 동부시베리아, 캄챠카 반도 등도 동해연안을 통해서 우리와 연결되며, 타타르해협(Tatar-strait)을 통해서 두만강 유역 및 북부지역과 사할린 홋카이도 또한 연결된다. 비록 완벽하거나 전형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비교적 지중해적 형태를 띠우고 있다. 이른바 多國間地中海(multinational-mediterranean-sea)에 해당한다. 필자는 동아시아의 이러한 지리적이고 문화적인 특성을 설명할 목적으로 동아시아의 내부 터로서 東亞地中海(EastAsian -mediterranean-sea)라는 모델을 설정하고 학문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역학관계의 비중에 따라서 中心部와 周邊部로 분할할 경우에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역은 중국지역, 한반도와 그 북부의 일부지역, 그리고 일본열도의 서부지역이 된다. 이들 지역들은 동아문화의 核을 이루고 있을뿐더러 정치․군사 역학관계에서도 직접적으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세계사적 규모로 확대되고, 지역 간의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이젠 동아시아가 하나로 뭉쳐야할 시기가 절박하게 도래했다. 결국 동아시아가 협력체 내지 연합체, 혹은 불록을 구성한다면 해양을 매개로한 지중해적 질서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유럽지중해와 카리브 및 걸프지중해, 동남아지중해 등과 경쟁하고 대결하는 동아지중해의 형성이 절실하다.
동아지중해 모델을 적용하여 동아시아의 정치 경제적인 성격을 규명할 경우에는 몇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동아시아에서 중심부와 주변부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지도가 쉽게 그려지니까 지역의 특성이 분명해지고, 그에 따라 국가 간, 지역 간의 역할분담이라는 도식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또한 구성국들 사이의 공질성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서구인들과 효과적으로 대결하려면 가까운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한다. 사실 이 지역은 수천 년 동안 협력과 경쟁, 갈등과 정복 등을 통해 공동의 역사활동권을 이루어왔다. 몇몇 대전쟁 외에는 실질적으로 국가간, 민족간의 대결은 그다지 심한 편이 아니었다. 지중해국가들, 그리고 유럽대륙 내의 국가들이 분열되어 대결한 사실에 비하면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해온 편이다. 이 지역은 지경학적(Geo-economic)으로도 교류나 교역 등을 하면서 상호필요한 존재로 인식하여 왔다. 지리문화적(geo-cultural)으로도 이 지역의 국가들은 유교 불교 등 종교현상뿐 만 아니라 정치제도 경제양식 한자 생활습관 등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그림 동아지중해 개념도
그림 황해 연근해항로도
그림 황해중부횡단항로도
동아지중해에서 가장 의미있는 역학관계의 핵이고, 실제로 힘의 충돌과 각축전이 벌어진 곳이 경기만이다. 경기만은 동아지중해에서 일본열도를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와 요동반도를 경유하여 산동반도까지 이어지는 남북연근해항로의 중간깃점이고, 동시에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동서횡단항로와 마주치는 해양교통의 結節点이다. 또한 한반도내에서도 경기만은 지정학적․지경학적․지문화적 입장에서 보아 필연적으로 각 국 간의 질서와 힘이 충돌하는 현장이었다.
이 갈등은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로 시작되었고, 다시 백제와 신라, 또 고구려와 신라의 대결로 변화되었다.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각 나라들은 존속기간 내내 생존을 걸고 치열한
그림 동아지중해 항해도(윤명철)
그림 통일신라시대 대 중국 항로도
그림 고려시대 국제항로도
공방전을 벌였다. 각 나라들은 상륙작전 등 해양을 통한 침투를 시도하고, 해안선근처에서 적극적인 공방전을 펼쳤다. 따라서 해양방어체제는 적 수군의 침입방어와 국토의 보존이라는 원론적인 목적 이외에 수도방어체제와 깊은 관련이 있고, 또한 외교통로 및 교역로를 보호한다는 다종의 의미를 가졌다. 따라서 각 나라들은 자국이 점유한 지역을 중심으로 치밀하고 복합적이며, 다양한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경기만의 해양방어체제는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 또 국가정책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가 있었다. 특히 그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당시의 전황은 물론, 전쟁의 기본성격과 당시 변화되는 국제질서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지리적․지형적․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해양방어체제의 구체적인 모델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2 강화도의 자연환경과 해양전략적 가치
강화는 본래 백제의 甲比古次이었다. 고구려의 穴口郡인데 首知縣, 冬奈音縣, 高木根縣이 있었다. 신라의 경덕왕이 海口라 고쳤으며, 首知縣은 首鎭, 冬奈音縣은 江陰縣, 高木根縣은 喬桐으로 바뀌었다. 그 후에 元聖王이 穴口鎭을 설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초에는 冽口縣이라고 부르다가 몽고병란을 당하여 고종 때에 江都라 하였다. 그러다가 말기인 우왕 때부터 강화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강화도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강과의 연관성이다. 한반도의 서쪽은 지형이 낮기 때문에 강들이 서해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계망을 구성하고 있다. 평양을 중심으로 청천강이 있고, 특히 남쪽으로는 예성강․임진강․한강이 하계망을 구성하면서 서해중부로 흘러들어가 경기만을 구성한다. 한강은 한반도의 중부 이남에서 가장 길고, 물이 풍부하며, 가장 넓은 하계망과 평야를 갖고 있는 강이다. 한강은 김포반도의 거의 끝나갈 즈음에 파주군 交河面을 거쳐 내려온 임진강의 하구와 만나고 다시 강화도 북단에서 예성강의 하구와 만난다.
이렇게 강화도는 한강과 예성강이 바다와 만나는 거대한 만의 한가운데를 막고 있으며, 북부의 동쪽에는 김포반도와의 사이에 강화수로(鹽河)라는 매우 좁고 조수의 흐름이 불규칙한 협수로가 있어 육지나 다름없는 강화도를 섬으로 만들어놓고 있다. 그러면서 경기도의 서쪽 지역과 옛 경기도의 일부인 개성 남쪽의 豊德과 甕津․海州 등 황해도의 남부해안 일대와 마주치는 북부 경기만의 입구를 꽉 채우고 있다.
강화도는 동으로 김포반도의 문수산성 등이 있는 통진 지역과 아래의 대곶지역과 인천광역시가 되버린 검단, 남으로는 영종도를 비롯한 도서지역, 서쪽으로는 교동도와 섬들이 점점이 바다 쪽으로 이어지면서 연평군도와 백령도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쪽은 예성강구와 만나는 넓은 만
그림 天地明圖 京畿道 (18C 후반, 52×32㎝, 목판본, 개인소장)
건너편에 연안군․白川郡의 여러 지역과 만나고 있다. 이러한 유리한 조건 때문에 일찍부터 인간이 살고 있었다. 하점면 삼거리의 신석기시대 주거지, 牛島의 신석기시대 패총 등이 있으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의 지석묘와 주거지 등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강화도의 지형조건은 다른 곳에 비하여 특이한 점이 많다. 일반적으로 서해안은 20~30cm의 퇴적층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강화도는 갯벌이 발달되어있다. 갯벌이 많다는 것은 선박의 진입과 접안이 어려움을 뜻한다. 때문에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매우 유리하다. 강화도가 국방상의 요충지였음은 수도의 입구인 ‘咽喉之處’이며, 한강과 바다가 만나는 海口라는 전략적인 장점도 있었지만 이러한 구체적이고 효율적인 방어상의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갯벌을 일찍부터 개간하여 농토로 만들었다. 현재의 기록으로 보아 강화도의 간척사업은 고려의 고종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이루어졌다. 일제시대에는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서 강화도의 지형은 매우 많이 변한 것이다.
섬 내부에는 穴口山․摩尼山․大母山․鎭江山․別立山․高麗山 등 해발 400m 이상 되는 큰산들이 있다. 강화군은 현재 9개의 작은 섬과 3개의 크고 작은 무수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섬들이 많고,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므로 곶과 포가 많으므로 방어시설을 설치할 필요성이 강하고 또 설치하기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섬의 크기는 남북이 28km 동서가 16km 주위가 112km에 달하며, 그밖에 섬들까지 합하면 해양면적은 더욱 늘어난다. 이러한 크기면 고대 이전에는 독립된 소국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그 후에도 지역의 특성상 중앙정부의 통제가 비교적 느슨한 지역 세력이 존재했을 것이다.
강화도는 경기만 가운데에서 최대의 만이고 핵심지역이다. 따라서 해양지리적으로 볼 때 2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 번째, 한반도 서안의 연안항로를 이용하고자 할 때 반드시 거쳐가거나, 그 영향권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고대의 항해는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육지에 근접하면서 항해하는 연안항해와 근해항해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한반도 남부에 있는 세력들과 제주도 그리고 일본열도를 오고가는 경우 반드시 통과해야할 곳은 경기만 지역이다. 경기만은 정치적 교섭, 교역, 군사작전을 막론하고 해양교통의 길목이었다. 한반도 북부를 통해서 내려오는 길과 중국의 강남에서 들어오는 길, 그리고 제주도에서 올라오는 길, 한반도의 남부동안에서 오는 길,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오는 길 등, 이러한 모든 물길이 상호교차하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 바로 경기만이다. 특히 강화도는 경기만 북부에 있으며, 고대 정치사에 있어서도 육지질서나 해양질서 모두 힘이 부딪치는 격전장이었다.
두 번째, 한반도 최대의 만은 경기만이다. 경기만을 장악하면 그물처럼 뻗은 하계망을 이용하여 한반도 중부지역을 통합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다. 경기만 가운데에서도 가장 넓은 곳이 바로 강화도로 이어지는 곳이다.
한강은 남북한강이 경기도 양수리에서 만날 때까지 한반도 중부의 거의 모든 지역과 연결되면서 흐르고 있다. 이 강이 최종적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 바로 강화도이다. 또한 연천, 파주 등 경기 이북을 흐르는 임진강이 김포반도에서 한강과 만나 다시 내려오다가 바다와 만나는 곳도 강화도이다. 특히 황해도 지역을 아우르며 특히 개성과 이어진 예성강이 한강과 만나는 곳도 강화도 북부이다. 최종적으로 만나, 다시 서해와 만나는 곳이 강화도이다. 예성강뿐만 아니라 연안군 등을 통하면 재령강과 연결되고, 대동강과도 이어질 수가 있다. 이러한 직접․간접으로 이어진 하계망을 활용하면 한반도 중부 지역 전체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다. 이들 세력들이 대외교섭을 하고자 할 때 出海口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강화도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穴口, 海口 등으로 불리운 것이다.
세 번째, 곳곳에 해양세력이 발호하고 성장할 수 있는 자연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해양세력은 무정부성과 호족성을 지니고 있다. 즉 중앙정부의 통제와 간섭을 받으려 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중앙정부가 통제하기도 힘든 것이 이러한 해상호족들이다. 그들이 발호하기에 좋은 조건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든든한 배후지와 자체가 자립할 수 있는 경작공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상로를 통제할 수 있는 물목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하고, 외부세력 혹은 중앙정부의 군사력을 방어하기에 좋은 전술적 잇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강화도는 이러한 잇점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특히 적당하게 크고, 핵심지역을 통제할 수 있으므로 단순한 해상세력이 아니라 국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이 있을 수 있다. 강화도는 이러한 해양지리적인 잇점이 있으므로 역사에서 소외된 변방이 아니라 일찍부터 역사의 중심무대에 있었다.
3 강화도의 해양역사상
이러한 가치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서해 연안항로가 이용되었을 경우에 강화도는 이미 중요한 해양거점으로서 기능을 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각종 유적을 비롯하여 청동기 철기시대의 유적들이 산포되어 있다. 특히 고인돌은 하점면을 비롯하여 대규모의 분포지가 많다. 三郞城의 전설, 마리산(摩尼山)의 제천단 등 단군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승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해양전략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청동기의 분포나 무덤 양식들로 보아 고조선 시대에도 남부와 북부, 중국지역을 이어주는 항로는 있어왔다. 때문에 소국들이 존재했다.
한편 백제는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서부해안을 갖고 있다는 지정학적인 조건과 력사적인 배경으로서 해양활동의 전통과 경험을 간직하고 있었다. 백제는 4세기에 근초고왕이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대고구려전을 과감히 수행하였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한편 東晉과의 교섭하여 국제질서에 편입하였다. 근초고왕 시대부터 백제는 바다를 건너 長江 하구인 建康(현 南京)에 수도를 둔 동진과 교섭하였다. 발달된 수군력과 항해술을 이용하여 황해 직항로를 개발하였다. 이때 강화도는 백제 해양진출의 전진기지로서 또는 수군함대 사령부가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고구려는 전기부터 해양활동이 활발했다. 그 후 다시 낙랑과 대방을 축출하면서 해양활동을 본격적으로 하였다. 미천왕때 서안평을 습격하고, 낙랑군을 멸했다. 압록강하구와 대동강 하구의 出海權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낙랑과 대방이 멸망하면서 고구려의 해상작전권은 반경이 확대되어 백제의 해양활동이 위협을 받게 되었고, 양국 간에는 해양갈등이 시작되었다. 고국원왕은 북방전선에서 燕 등과 교전을 하는 한편 평양을 중시한다. 4년에 평양성을 증축하는 등,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다가 평양성 공방전때 전사하였다.
이어 황해중부 해상권의 확보와 해양활동 능력의 확대를 놓고 갈등을 벌일 때 광개토대왕이 등극하였다. 그는 첫 해 부터 왕성한 정복활동을 펼쳤다. 북방종족과는 화전양면책을 구사하였으나 남진정책은 공격적이었다. 대왕은 백제를 정벌하여 石峴 등 10성을 빼앗았다. 이어 10월에는 최전방기지이자 수군함대사령부였던 關彌城을 함락시켰다.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견해가 있는데, 하점면 봉천산일대일 가능성이 크다. 태왕은 6년(396)에 대규모의 수군을 투입하여 백제의 58성과 700 촌을 탈취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기병과 수군을 활용한 선제공격 및 협공을 하는 수륙양면작전을 구사하였다. 관미성 외에도 당시 沸城(통진), 阿旦城(아차산성), 彌鄒城(인천), 牟盧城(용인) 등이 점령된 것으로 보아 육군 외에 수군은 3개방향으로 상륙했던 것 같다. 경기만 쟁탈전 및 서해안의 해상권 장악과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첫째는, 대동강유역에서 출발하여 예성강 하구와 한강이 만나는 강화북부에서 한강하류를 거슬러 오면서 김포반도와 수도를 직공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한성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남양만으로 상륙하여 수원, 용인을 거쳐 한성의 배후를 치는 것이다. 이때 1로와 2로의 일부는 강화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경기만은 해상교통 및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통합시키는 내륙수로교통의 요충지였으므로 서해연안의 요충지들을 점령하고 수군활동을 마비시키는데 더 없는 공격목표였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수군작전은 경기만의 入出口였던 강화도가 핵심이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고구려가 강화도(교동도를 포함) 혹은 한강水系 하류지역의 한 지점으로 비정되는 關彌城과 通津으로 추정되는 沸城, 인천지역으로 비정되는 彌鄒城, 南陽灣 지역 등을 점령한 사실은 서해안, 경기만의 해상권 장악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위치가 밝혀진 성들의 다수가 해안의 가까이 위치한 사실과 고구려가 수군을 이용해 공격한 사실은 해양활동과 관련하여 강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림 광개토태왕의 396년전투도
광개토태왕이 이러한 군사작전을 펼치고 경기만에 비중을 둔 것은 백제를 주공격대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농경지를 확보한다는 기본적인 동기 외에 동아시아의 질서재편을 주도하려는 좀 더 복합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추진된 것이다. 이른바 동아지중해 중핵국가로서 받돋음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팽창한 고구려는 대륙의 남부와 한반도 북부, 황해중부 이북의 해양에 걸쳐 있는 지중해(mediterranean-sea)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대륙중심의 질서와 해양중심의 질서를 동시에 집행하고 영향을 받을 수가 있었다. 대왕은 지정학적인 위치를 활용하여 동아시아 각국을 연결하므로써 자국중심의 거대한 網(中核,core)을 구성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뒤를 이어 등장한 장수왕은 선왕의 뜻을 충실하게 이어받아 성공시킨 인물이다.
그는 변화의 과정에서 국제질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성공하였고, 그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이 평양으로의 천도와 475년에 한성을 전면적으로 공격하여 경기만을 장악한 것이다. 이 후 강화도는 고구려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혈구군을 설치하고 속현 등을 두어 지배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강화도의 곳곳에는 고구려와 관련된 지명과 전설 등이 많이 있다. 이후 신라가 穴口鎭을 설치하였다. 이는 물론 청해진, 당성진 등 당시에 세워진 해적방어책과 해양세력의 제어라는 목적의 일환으로 설치된 것이다. 그러나 패강진의 설치에서 나타나듯이 북방방어의 기능도 있었을 것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전형적인 강화만 세력이다. 왕건의 집안은 언제부터 경기만에 정착하였고, 해상실력자가 되었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하지만 작제건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해상세력이 되었다. 이때는 이른바 신라하대의 혼란기였다. 각 해역을 중심으로 해상세력들이 발호하였던 것 같다. 신라는 중앙정부에 위협적인 이 세력들을 제어하고, 해적들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몇 군데 진을 설치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장보고의 청해진이고, 또 경기만의 혈구진, 장구진이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거점으로 동아지중해 서부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경기만에는 강력한 해상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력은 작제건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김관의가 지었다는 편년통록에는 작제건에 관하여 재미있는,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듯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당 지역과 무역을 하였고, 白州(배천)의 劉相晞 등이 개주․정주․염주․배주 등 4개 주와 江華․喬桐․河陰 삼현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영안성과 궁실을 쌓았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해석한다면 왕건 집안은 작제건 시대에 이미 내륙 하항도시인 開州(개성), 貞州(풍덕), 鹽州(연안), 白州(배천) 4개주와 江華, 喬桐, 河陰(강화북부) 등 3개 현인 현재 황해도 남부와 경기도 서부, 강화도가 만나고, 황해와 한강하류와 예성강이 합쳐지는 이 소지중해 같은 곳에서 성장한 해상토호이다. 결국 신라가 설치한 패강진, 장구진, 혈구진 일대가 왕건 집안의 세력권 하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은 혈구진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완전하게 장악한 것은 아닐 것이다. 후대에 궁예는 혈구성을 결국은 무력으로 함락시켰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경기만 안에 있고, 강화지역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孔巖(현재 강서구 가양동 방화동 일대) 黔浦(김포시, 검단면 일대)등은 또 다른 권력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면 왕건 세력이 궁예에게 투항한 이후에도 저항을 하였다.(삼국사기 궁예전)
그림 고려시대 벽란도( 개성박물관)
그림 고려의 대외무역도( 개성박물관)
고려시대에 강화도는 대외교섭의 창구였다. 경기만은 수도인 개경의 입출처로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긴요한 역할을 하였다. 황해중부의 동서횡단항로가 사용되고, 일본 유구 등으로 이어지는 연근해항로, 현재의 강소성 지역과 이어지는 황해남부 사단항로, 멀리 현재의 절강성 지역인 영파 등과 이어지는 동중국해 사단항로는 모두 이 경기만을 이용하였다. 모든 物流와 文流의 로타리였다.
그림 마포 서해에서사용한 배
예성강 하구(강화도에서 본 모습)
특히 강화도는 중요했다. 使行船가 상선들은 개경을 빠져나와 육로를 거쳐 일단 碧瀾渡에서 배를 타고 예성강을 타고 내려오면 현재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의 호수 같은 바다입구가 나타난다. 강화만이라고 불리우는 좁은 협수로는 물길이 동서남북의 4군데에서 모여들기 때문에 물길이 복잡하고, 특히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므로 조류의 흐름이 불규칙하여 항해하기에 매우 힘들다. 이 곳을 빠져나가면 일단 넓은 경기만이 나타난다. 연평군도가 나타나면 항로가 나뉘어진다.
그림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
그림 중국 절강성 주산을 출발한 뗏목
4 경기만과 강화도의 21세기적 의미
21세기 국제환경은 급박하게 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경기만과 한강 하구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21세기를 맞은 한강하류지역은 어떠한 위상을 지녀야하고, 또 어떠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까?
동아시아는 긴밀한 협력이 실현되고, 머지않은 장래에 경제공동체가 구성된다. 필자는 이미 2000년에 동아연방의 탄생을 예측한 바 있듯이 궁극적으로는 정치공동체가 구성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차지한 우리민족의 위상과 역할이다. 향후 경제 정치 군사력에서 우리의 힘이 주변강국들에 비해 열세를 면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지극히 회의적인 처지이다. 그러나 신질서의 편성 과정에서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하나의 강점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동해 남해 황해 동중국해로 이어진 동아지중해의 중핵(core)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분단시대, 냉전시대에는 적대적인 양대 힘이 격돌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우리에게 풀어버릴 수 없는 굴레를 씌웠었다. 러시아나 중국과는 육로는 물론 해로로도 교섭이 불가능했다. 일본 역시 소비에트나 북한 중국과는 바다가 아니면 교섭이 불가능했고, 또 바다로도 교섭할 수가 없었다. 한국은 일본을 통하지 않고서는 다른 외국과의 교섭이 전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연결과 협력의 시대이다. 남북이 긍정적으로 통일될 경우,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공히 활용하며, 동해 남해 황해 동중국해 전체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특히 모든 지역과 국가를 전체적으로 연결하는 해양 네트워크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다. 우리 바다를 통해서만이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교류할 수가 있다.
중요한 해로를 장악하고, 이를 지렛대로 삼아 해양조정력을 가질 경우에는 각국 간에 벌어지는 해양충돌 및 정치적인 갈등도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건설하고 활용하여 뒷받침만 된다면 동아시아에서 하나뿐인 물류체계의 핵심 로타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교통정리가 가능하고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경제구조나 교역형태를 조정하는 가교역할까지 할 수 있다. 이처럼 국가정책에서 해양의 비중을 높이고, 中核連結地의 역할을 충실히 할 경우에동아시아에서 정치적이고 군사적으로 비중이 상승함은 물론이지만 경제적이나 교역상에서도 이익을 많이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동아지중해에서 가장 의미있는 역학관계의 核이고, 실제로 힘의 충돌과 각축전이 벌어진 곳이 경기만이다.
경기만은 황해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한반도 최대의 만으로서 동아지중해에서 일본열도를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와 요동반도를 경유하여 산동까지 이어지는 남북연근해항로의 중간깃점이고, 동시에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동서횡단항로와 마주치는 해양교통의 結節点이다. 또한 한반도내에서도 경기만은 지정학적 지경학적 지문화적 입장에서 보아 필연적으로 분열된 각 국간의 질서와 힘이 충돌하는 현장이었다. 북한지역과의 교역은 물론 중국의 여러지역 특히 산동 이북의 지역들과 교역하고자 할 때 그 중요한 포스트는 당연히 경기만지역이다. 즉 물류교통의 핵심로타리이다. 더구나 냉전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열정의 시대, 군사의 시대가 끝나고 경제의 시대가 다가오면서 경기만은 이제 만남과 교류의 장이 되었고, 물류가 집산하고 거쳐가는 실질적인 중핵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국은 2002년 11월에 경기만의 중심인 인천에 송도신도시를 특구로 삼는 '경제자유구역법'이라는 특구관련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북한은 2002년 9월 신의주에 경제특구를 건설하겠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지금은 개성공단의 조성되어 운영중이다. 이러한 최근의 움직임들은 서해안, 그리고 경기만과 관련이 깊다. 현재는 남북이 각각 인천과 개성을 중핵(core)으로 삼으려하지만 적어도 특구에 관한한 선배인 중국 등의 선례로 보아 불원간 그 범위와 지위는 확대될 것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남으로는 평택항 지역, 인천의 해안지역 강화도 김포반도를 거쳐 북으로는 개성 해주로 이어지는 해안벨트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이른바 경기만 해안경제특별구가 설치될 수도 있다. 즉 하나의 필드로 엮는 범경기만 경제특구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에 한강 하류 및 서울 인천 영종도 개성 해주 등과 이어지는 강화도는 매우 유리한 환경이다.
뿐만 아니라 경기만과 한강하구는 정치적이고 문명적인 상징성도 높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냉전 구도가 정착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단단하게 얼어붙은 곳이 바로 한강하류와 경기만 해역이었다. 특히 한강 하구 강화도는 정치 외교적인 장소로서뿐 만 아니라 남북의 해군과 육군이 충돌하는 군사지역이었다. 연평해전은 그러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 동안 북한의 황해남도, 경기도 고양, 파주, 김포 그리고 강화도가 만나는 하류지역은 양 지역의 어떠한 선박이나 사람도 통항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한강하류는 간첩이 오고가는 치안지역이었다. 그런데 사실 정전협정의 제1조 제5항에 따르면 "한강 하구의 수역으로서 그 한쪽 강안(강 기슭)이 다른 일방의 통제 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민간선박의 항행에 이를 개방한다.----쌍방 민간선박이 항해함에 있어 자기 측의 군사통제하에 있는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않는다고 되어있다."라고 되어 있다. 형식적으로는 통행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었다.
동아지중해는 원래가 열린 질서, 공존의 질서, 평화구도였다. 냉전구조와 분단대결 속에서 경기만은 막힌 바다, 폐쇄된 공간이 되었으나 이제 다시 변화하고 있다. 특히 한강은 동아지중해의 중핵 중에서도 핵에 해당하는 실질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이다. 한강하구의 하항도시가 서울이고 김포이며, 해항도시는 강화도다. 결국 한강하구를 통해서 세계로 나갈 수 있고, 모든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곳에 평화가 깃들면 동아지중해도 평화로워지고, 이곳이 열려 있으면 동아지중해의 전 지역이 열린다. 일종의 평화지역(PEACE ZON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