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한국, 광주의 작은 동네 양림동. 한국전쟁의 암울한 그림자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 중심에는 박순이 선생과 양림동 선교사들이 있었다. 1908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에 파송된 로버트 윌슨 선교사 (한국명: 우월순)와 박애신 여사 (박순이 선생의 어머니)의 만남은 신앙과 헌신, 그리고 사랑의 이야기를 펼친다. 이들의 만남은 단순히 한 가족의 이야기를 넘어 수많은 고아와 병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준 기적의 시작이었다.
■ 어려움 속에서도 빛나는 헌신과 사랑 박애신 여사(박순이의 어머니)
일제강점기 시절, 남편과 연락(박순이를 낳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난 후)이 끊긴 채 홀로 외동딸 박순이를 키우던 박애신 여사는 삶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때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바로 우월순 선교사였다. 우월순 선교사는 광주 양림동에 위치한 제중병원 (현재 광주기독병원)의 2대 원장으로 취임하며 복음 전파와 의료 봉사를 함께 실천했다.
7명의 자녀를 돌보는 데 도움이 필요했던 우월순 선교사는 진실한 크리스천인 박애신 여사를 침모로 채용했다. 박애신 여사는 그때부터 선교사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자녀들을 돌보고 한복과 세라복을 만들어 입히며 가족의 일원으로 지내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과 눈부신 헌신과 사랑은 선교사 가족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아이들은 박애신 여사를 '애신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
■ 선교사들과의 생활
1926년, 우월순 선교사 가족이 여수 애양원으로 이동하면서 박애신 여사는 로버트 녹스와 메이 녹스 (한국명: 노라복과 노메이) 가족의 요리사로 일하게 되었다. 박애신 여사는 요리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다양한 서양 요리를 배웠고, 이를 통해 서양 귀빈들이 광주를 방문할 때마다 훌륭한 음식을 대접할 수 있었다. 충현원 생활관이 미국 대사 부인의 숙소로 제공될 정도로 그녀의 요리 솜씨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박애신 여사의 헌신과 사랑 속에서 성장한 박순이 선생은 자연스럽게 영어와 서양 요리를 배우며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 가족과 함께 지내며 박순이 선생은 국제적 감각과 봉사 정신을 몸에 익히게 되었다. 이는 훗날 그녀가 충현원을 설립하고 수많은 고아를 돌보는 일에 헌신하게 된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박애신 여사는 여수 애양원에서 발생하는 미망 아들을 돌보는 일에도 참여했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은 박애신 여사의 모습은 딸 박순이 선생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충현원의 설립과 헌신적인 삶
1949년, 박순이 선생은 전쟁으로 인해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보호시설 충현원을 설립했다. 이때 양림동 선교사들은 박순이 선생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던 집을 박순이 선생에게 빌려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충현원이 세워질 수 있었다.
박순이 선생은 단순히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이들이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도록 '탈시설화'를 추구했다. 또한,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의료 지원, 교육, 정서적 지지를 제공했다.
■ 지역 사회에 희망을 불어넣다
충현원의 설립은 양림동에 큰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버려진 아이들이 따뜻한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지역 주민들은 박순이 선생과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하며 서로를 돌보는 마음을 키워나갔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박순이 선생과 선교사들은 끊임없이 노력했고, 미혼모와 그들의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집과 아동상담소를 설립해 사회 각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봉사했다.
박순이 선생과 양림동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가 아닌,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이들의 헌신적인 삶을 기억하며,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박순이 선생과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양림동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큰 감동과 영감을 주고 있다.
■ 과거의 영광을 뛰어넘어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약
박순이 선생과 양림동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설립된 충현원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시대였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속에서 수많은 고아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따뜻한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하지만 현재 충현원은 과거의 영광 속에 갇혀있다. 사회와의 소통이 부족하다는 지적과 과거의 빛나는 업적을 기억하면서도,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도약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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