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289호 왕궁리 오층석탑

국보 제123호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구

원영혜 전문기자 승인 2024.10.05 20:09 | 최종 수정 2024.10.06 04:19 의견 0
사리장엄구 유리제 사리병과 금제 사리내함
국보 제 123호 사리장엄구 청동여래입상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본격적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백제 시대에 경영되었던 궁성이 폐기되자 궁성 터에 탑·금당·강당을 남북 일직선으로 배치한 백제의 전형적인 1탑 1금당식 사찰을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본래 목탑이었던 것이 현재의 석탑으로 바뀌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에 압승하기 위하여 궁터 앞에 10장 높이의 왕궁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의 건립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56] 고적조에는 “옛 궁터에 오층석탑이 있는데 왕금탑(王金塔)이라 부른다.”라고 되어 있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있다.

이 석탑은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 양식[옥개석]과 신라 양식[단층기단, 탑신부]이 함께 잘 어우러져 있는 석탑이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유사하여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석탑에서 백제계 석탑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원영혜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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