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사는 과거 흥복사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고찰이다. 조선 태조때 조계종 본사가 되었다가 후에 폐지되었다. 1464년(세조 10) 중건하고 원각사라 하였다.
도성 내의 3대사찰의 하나로 번창하다가 1504년(연산군 10) 폐사되고, 장악원 또는 연방원이라는 기생방이 되었다가 1514년(중종 9) 폐사의 재목을 공용건물 영선에 사용함으로써 사찰 건물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 터는 지금 탑골공원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가 남아 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높이 12m. 이 석탑은 전체를 대리석으로 건조하였는데, 형태가 특수하고, 의장이 풍부하여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우수작이라 하겠다.
기단부는 3층으로 구성되었는데, 건축기단으로서 면석과 갑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평면은 亞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층마다 각 면석에는 여러 가지 조각으로 화사하게 장식되었는데, 초층에는 각 면에 용(龍), 혹은 사자(獅子)와 모란(牡丹)·연화문(蓮華文)이 조식되고, 2층에는 각종의 인물·조수(鳥獸)·초목·궁전을 표현하였으며, 3층에는 많은 나한과 선인들을 조각하였다.
각 층의 갑석은 하면에 웅건한 당초문이 조식되고, 측면은 굽을 돌출시켜 갑석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상층기단 갑석 상단에는 난간을 장식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도록 하여 주목되고 있다.
탑신부는 초층부터 3층까지 평면이 기단과 같이 亞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4층부터는 방형(方形)으로서 이 윗부분은 일반형 석탑의 탑신과 그 형태가 같다. 각 층의 옥신에는 하단부에 굄대를 높직하게 마련하고 측면에는 난간을 모각하였다.
각 면 중앙에 12회(十二會)의 불(佛)·보살(菩薩)·천인상(天人像) 등을 조각하였으며, 네 귀퉁이에는 원형의 석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층마다 팔작지붕을 하였고, 하면에 두공(枓栱)을 모각하였는데, 지붕의 기왓골 등 모두 목조건축의 옥개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특히, 2층 정면의 지붕은 전각지붕과도 같고, 더욱이 3층은 이중의 지붕모양으로 조성되어서 그 의장과 기교가 놀랍다. 이 석탑은 전면에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 석재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서 한층 더 우아한 맛이 있다.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의 구조, 그리고 표면 전면에 장식된 불상의 조각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십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사용된 석재가 대리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석탑의 소속 사원(寺院)이었던 원각사는 1465년(세조 11)에 창건되었으며, 따라서 이 석탑도 사찰 창건 당시의 건조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수려하고도 기교적인 면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탑파사상(塔婆史上) 손꼽히는 걸작품이라 하겠다.
석탑은 『세조실록』에 “1467년(세조 13) 4월 8일 원각사탑이 완성되어 연등회를 열었다”고기록된 점으로 보아 1467년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고, 「원각사비문」에는 “분신사리와 신역원 각경(新譯圓覺經)을 안치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각사탑 공식 명칭은 ‘국보 원각사지십층석탑’(이하 원각사탑)이다. 남동신(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은 10층이 들어간 명칭이 세키노 타다시의 10층설과 이후 다층설 등 “전제의 오류 위에 구축”된 것이라고 본다. 남동신은 10층설·다층설을 폐기하고, 대원각사비(이하 원각사비) 기록을 근거로 13층설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간하는 학술 간행물 ‘미술잡지’ 100호에 기고한 논문 ‘원각사 13층탑에 대한 근대적 인식과 오해’에서 “원각사탑이 13층탑으로 건립됐다는 근거가 명백한데도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 지금까지 100년이 넘도록 13층설은 단 한 번도 공인받지 못했으며, 학계에서 층수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도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근대 건축학자(세키노)가 아니라 창건주(創建主) 관점에 서서 원각사탑의 층수를 바로잡으려 한다”고 했다. 그는 여러 근거를 들어 이 논거를 펼쳤다. 다음은 남동신 논문을 요약한 것이다.
■10층설의 기원
세키노는 근대건축학의 이름으로 원각사탑을 최초로 학술 조사한 이다. 동경제대 공대 조교수로 재직하다 1902년 7월 한국을 찾아 여러 건축을 조사했다. 이듬해 9월 원각사탑에 관한 짧은 논고를 발표했다. 그는 이때 원 순제(順帝)가 지정(至正) 8년(고려 충목왕 4년, 1348년) 경천사탑과 원각사탑을 제작해 고려로 보냈다는 <금릉집>의 설을 받아들였다. 13층설을 속칭이라 치부하고 ‘3중의 기단 위에 탑신 10층이 올려진 대리석탑’이라는 10층설을 최초로 제기했다. 이 설이 120년 동안 원각사탑 명칭에 영향을 끼친다.
■13층설의 근거
원각사비(1471년)에는 세조가 원각사탑을 ‘13층탑’으로 건립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린 ‘원각사비’에서도 ‘탑 13층을 세웠다’라는 구절이 확인된다. <동국여지승람> 편찬자들은 원각사탑의 모범인 경천사탑이 ‘13층탑’임을 인식했다.
세키노보다 먼저 원각사탑을 조사한 이가 후에 식민지 교육을 추진한 교육관료이자 역사학자 시데하라 타이라다. 1900년 대한제국 정부의 학부고문 자격으로 조선에 왔다. 그는 경천사탑과 원각사탑 모두 원에서 가져온 것으로 간주했는데, 현지 조선인들의 전문을 받아들여 두 탑 모두 13층탑이라고 했다. 원각사비가 세조 10년 원각사 재흥과 관련 있다는 글도 남겼다. 그는 이후 13층설을 견지했다.
1906년 6월 도쿄제대 법대 출신의 아사미 린타로가 통감부 법무원 평정관으로 왔다. 그는 조선의 일본인들이 창립한 ‘조선고서간행회’에 참여했는데, 1909년 무렵 <속동문선>을 열람하다 ‘대원각사비명’ 중 ‘십유삼층(十有三層)’이라는 구절을 발견했다. 원각사비 앞 뒷면은 탑 층수와 관련된 구절은 마멸이 심해 판독이 힘든데, 문헌 자료로 층수를 확인한 것이다. 1908년 한국에 다시 온 세키노는 이듬해 아사미의 발견을 반영했다. 건립 주체와 시기, 탑 층수의 자기 기존 견해를 모두 수정한 것이다. ‘파고다공원’(탑골공원)의 원각사탑은 세조가 경천사에 있던 고려 말 13층 석탑을 모방해 건립한 13층의 대리석탑임을 분명히 했다.
1913년 세키노는 다시 13층설을 다시 바꾸어 다층석탑(탑신이 여러 층으로 된 탑)이라는 다층설을 처음 제기했다. 이후 세키노는 이 설을 끝까지 고수했다. 1934년 5월 원각사탑은 보물 제4호로 지정되면서 ‘원각사지다층석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3층설과 10층설을 절충해 모호한 ‘다층’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원각사탑을 13층탑이라고 인식했다. 한국미술사 개척자인 고유섭(1905~1944)은 처음엔 다층설을 받아들이다가 13층설로 정정했다.
■해방 이후 층수는
1961년 12월 군사정권 최고회의는 문화재보호법안을 심의 통과시켰다. 문화재보호법에 근거해 설치한 문화재위원회는 이듬해 7월12일 제6차 회의에서 ‘원각사지다층석탑’을 국보 4호로 지정했다. 11월23일 제17차 회의에서 ‘원각사지다층석탑’을 ‘원각사지10층석탑’으로 수정 의결했다.
남동신은 이 논문에서 현재 10층설은 김원용의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추정한다. 1960년 초 경천사탑 복원 공사를 마치고, 문화재로 처음 지정할 때 조사를 담당한 김원용이 세키노의 1904년 보고서를 토대로 경천사탑을 10층탑’이라 확정했다. 1962년 17차 회의에서 1934년 이후 다층탑으로 불리던 원각사탑의 명칭을 그 모범인 경천사탑에 준하여 다시 10층탑으로 되돌렸다는 것이다. 이때 확정된 경천사탑과 원각사탑 두 탑의 10층설이 대중화하면서 60년 동안 정설로 자리 잡았다.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4년 겨울부터 1897년 봄 사이 네 차례 조선을 방문했다. 비숍은 원각사탑은 원래 13층이었는데, 제일 상층부의 3개 층이 300년 전 일본 침략(임진왜란으로 추정)으로 석탑 옆에 내려졌다는 구전을 채록했다. 동네 아이들이 탑에서 조각을 떼서 외지인들에게 기념품으로 팔았다는 기록도 남겼다.
원영혜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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