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을 다녀오는 길에 진관사(津寬寺)로 하산하면서, 자연스럽게 북한산 둘레길 중 마실길(제9길)과 제10길(내시묘역길)을 걸었다. 해당 구간의 경우 평지가 많고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걷기에 부담이 없는 곳으로, 꼼꼼히 사진 찍으며 둘러보아도 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

▲ 진관사 태극기 안내표석, 진관사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진관사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다. ⓒ 김희태
▲ 진관사 사가독서터 안내판, 1422년(세종 24) 진관사에서 집현전 학자(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이개, 하위지, 이석형)들이 사가독서를 했다고 한다. ⓒ 김희태

특히, 북한산을 하산한 장소이자 둘레길의 해당 구간 중 진관사(津寬寺)가 있는데, 몇 가지 알고 보면 좋은 현장이다. 우선 진관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유산은 단연 칠성각(七星閣)의 해체 및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가 있다.

▲ 진관사 칠성각(七星閣), 해당 건물의 해체 및 복원 과정에서 진관사 태극기가 발견되었다. ⓒ 김희태

진관사 태극기가 특별한 건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덧입힌 것인데, 그 자체로 항일과 상징성의 측면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현재 진관사 태극기는 보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진관사(津寬寺), 과거 신혈사(神穴寺)로 불렸으나, 고려 현종이 왕이 된 뒤 사찰의 이름을 진관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 김희태

또한, 진관사는 과거 신혈사(神穴寺)로 불렸는데, 훗날 고려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이 되는 즉위한 대량원군(大良院君)이 승려로 출가했던 곳이다. 훗날 강조의 정변으로, 현종이 왕이 된 뒤 현재의 명칭인 진관사로 바뀌었는데, 신혈사의 승려인 진관이 현종을 잘 보살펴주고,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고 볼 수 있다.

▲ 1.21사태 무장공비 침투로 안내판, 진관사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안내판이다. ⓒ 김희태
▲ 북한산 사모바위, 바위 아래 좁은 공간에 1.21사태 당시 무장공비 은신 장소가 있다. ⓒ 김희태
▲ 무장공비 은신 장소, 은신했던 무장공비를 밀랍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 김희태

마지막으로 진관사는 '1.21사태' 당시 김신조 일당의 침투로였는데, 이와 관련해 진관사 초입에 관련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또한, 북한산 사모바위 밑 좁은 공간에 무장공비들이 은신했던 장소가 남아 있는데, 무장공비 밀랍인형이 재현되어 있다.

▲ 북한산 둘레길 마실길(제9길) 구간, 진관사를 출발해 북한산 둘레길 중 마실길을 걸었다. ⓒ 김희태

그렇게 하산하면서 진관사를 둘러본 뒤 북한산 둘레길의 이정표 앞에 섰다. 본격적으로 북한산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첫 시작은 마실길(제9길)이다. 해당 구간에는 산성정계(山城㝎界) 각석이 있어 눈길을 끈다.

▲ 바위에 새겨진 산성정계 각석, 북한산성의 경계를 표시한 금석문이다. ⓒ 김희태

데크 옆 바위에는 '山城㝎界'(산성정계)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북한산성의 경계를 표시한 것이다. 안내문을 보면 해당 각석을 새긴 이유가 확인되는데, <승정원일기>에는 북한산성의 서쪽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5리 이내의 경계를 정하고, 개간한 땅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했다고 한다. 둘레길에서 만나는 북한산성의 흔적이라고 해야 할까?

▲ 북한산 둘레길 이정표, 길 곳곳에 이정표가 있어 길을 헤맬 염려는 없다. ⓒ 김희태

산성정계 각석을 뒤로 하고 길을 걸었다. 길을 걷는 곳곳에는 북한산 둘레길의 이정표를 계속 만날 수 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내시묘역길(제10길)을 들어섰는데, 해당 구간을 걷다 보면 마을 초입에 있는 여기소 경로당을 지나게 된다.

▲ 여기소 터 표지석, 북한산성의 축성에 동원된 관리와 기생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관련한 전설을 담고 있다. ⓒ 김희태

경로당 마당에는 여기소 터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해당 표석을 통해 '여기소'가 전설의 한 장면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북한산성의 축성에 동원된 관리와 기생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당시 기생이 몸을 던졌던 연못을 '여기소(汝其沼)'라 불렀다고 한다.

▲ 북한산 둘레길 내시묘역길(제10길) 구간, 백화사를 지나면 위의 입구를 지나 숲길로 들어선다. ⓒ 김희태

한편, 여기소 경로당을 출발해 마을 길을 걷다 보면 길의 끝자락에 백화사란 이름의 사찰이 있고, 이곳부터는 숲길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또 하나의 주목해 볼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데, 바로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다.

▲ 내시묘역길에서 만날 수 있는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날 수 있는 자연과 역사의 만남이다. ⓒ 김희태

해당 표석은 경천군 이해룡(李海龍)이 1614년(광해군 6) 광해군에게 사패지(賜牌地)로 받는 토지이자 송금, 즉 소나무의 벌채를 금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의 전면에는 '경천군사패정계내송금물침비(慶川君賜牌定界內松禁勿侵碑')가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만력사십이년갑인십월일립(萬曆四十二年甲寅十月日立)'이 새겨져 있다.

▲ 경천군 송금물침비, 해당 비석은 경천군의 사패지이자 송금, 즉 소나무를 보호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김희태

비에 새겨진 '송금(松禁)'에서 알 수 있듯 조선은 소나무의 보호에 진심이었는데, 그만큼 소나무가 쓰임새가 많았던 나무였다. 실제 소나무는 군선을 만드는데 사용되었기에 해안가 가까운 곳의 소나무가 많은 곳은 특별히 선재봉산(船材封山)으로 지정해 보호했다.

▲ 송금(松禁), 소나무를 보호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노력을 금석문으로 만날 수 있다. ⓒ 김희태

또한, 황장목의 경우 왕과 왕비의 관인 재궁(梓宮)과 궁궐 건축용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밖에 기와나 도자기를 만드는데 사용되기도 했으며, 송화가루는 약재로 썼으며, 송진을 채취하는 등 소나무는 조선판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해도 손색없다.

이처럼 북한산 둘레길은 단순히 걷기의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걷기 그 이상으로, 길에 담긴 자연과 역사의 조화를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여정이다. '진관사'부터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까지 길을 걷다 함께 보면 좋은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어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실 때 주목해 보실 것을 추천드린다.

김희태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