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4.19혁명의 광주 시위는 광주고 학생들에게서 부터 시작되었다

- 광주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4.19혁명의 불꽃을 밝힌 서막이었다
- 광주 4.19혁명은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이 주도했다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4.19 10:27 | 최종 수정 2024.04.19 12:13 의견 0

광주 4.19민주혁명 발상지! 광주고등학교 전문 전경

1960년 3월 15일 집권 자유당이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화로 획책한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의 부정에 맞선 광주 3.15 의거는 4.19혁명의 중요한 촉매제가 되었으며, 순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간 시민 혁명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월 15일 오후 12시 45분(동아일보 기사), 민주당 광주시당 앞에서 시작된 이 시위는 약 1천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으며 이는 전국 최초로 부정 선거 무효를 외친 시위였다. 이후 1960년 4월 19일 혁명의 불씨가 된 광주 3.15 "곡(哭, 울곡) 민주주의 장송" 시위는 단순한 시위가 아닌, 억압과 부정선거에 맞서 싸우는 시민들과 학생들의 절규와 민주주의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담긴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국 최초로 3.15 부정 선거 무효를 외쳤던 "광주 3.15장송시위" 장면과 시민들의 4.19혁명 시위 장면(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 전국 최초로 3.15부정선거 무효를 외쳤던 광주3.15장송시위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은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를 치렀다. 그러나 선거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의 광범위한 부정선거가 드러나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특히, 전라남도 광주시 77개 투표소는 대부분 100미터 이내에 자유당 완장 부대와 반공청년 부대가 여기저기 배치되어 민주당 참관인의 투표소 입장이 거부·축출 당하였고, 어떤 곳에서는 부녀자가 투표통지서를 요구하자 폭행을 당해 중상을 입어 병원으로 후송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민주당 전남 도당은 투표소 참관인의 철수를 지시했고 부정선거 규탄 거리시위를 하자는데 뜻이 모아졌다. 그래서 제작된 플래카드가 '곡(哭, 울곡) 민주주의' 였고, 훗날 민주주의 장송 시위로 불리게 된 이유가 된다.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장송 시위는 전국 최초의 3.15 부정 선거 규탄 대회였다. 당시 민주당 중앙 당사에서는 4시 30분에 선거 무효를 선언했고, 마산에서는 이보다 앞선 3시 30분에 선거 무효를 선언한 후 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광주 민주당원이 중심이 된 금남로의 시위는 이보다 앞선 12시 45분경이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시간을 12시 45분경으로, 옛 <전남일보>는 12시 50분경으로 쓰고 있다]. 이날 광주 시위는 당시의 <동아일보>와 <전남일보>, <조선일보>에 보도되었지만 15일 7시경에 일어난 마산의 2차 시위 당시 경찰의 발포로 시위 학생들의 피해가 속출한 마산항쟁에 묻히고 말았다.

1천여 군중이 합세한 광주의 3.15 민주주의 장송 시위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 선거에 항거하여 선거 무효를 선언한 전국 최초의 시위였고, 장총의 개머리판으로 후두부를 맞아 금남로에 흘린 조계현(당시 26세, 이필호 의원 보좌관)의 피는 4.19혁명의 첫 피었다.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진 시위는 결국 4.19혁명의 불씨가 되어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로 이어져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4월19일 10시40분 광주고등학생들이 선생님과 경찰이 막고 있는 교문앞 장면과 학생들이 경찰의 저지를 받고 있는 장면, 광주고 4.19혁명 중심인물 고 이홍길 선생과 금남로공원 4.19혁명의 진원지 표지석

▶ 광주 4.19혁명은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12년 장기집권체제를 연장하고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대규모 선거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한 반발로 광주, 마산에서 시위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4.19혁명은 세계 혁명사상 유일하게 순수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민혁명이었다. 3.15부정선거 국면에서 선거 부정에 저항하며 시위에 나섰던 이들은 대부분 고등학생들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학생의 경우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까지 거의 시위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1960년 당시 대학은 4월에 개강했다. 부정선거가 치러진 3월의 경우 대부분 방학 중으로 대학생들의 결집은 4월 개강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3.15부정선거와 김주열 피살에 분노하며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거한 평화적인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가 동원한 정치깡패들이 시위 후 돌아가는 학생들을 습격하여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를 촉발하여 이후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광주고 교정 안쪽에 있는 광주 4.19혁명 발상 기념탑과 4.19민주혁명역사관 전경

◾️광주 4.19혁명 발상지 - 광주고

1960년 4월 19일의 광주 시위는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되었다. 그 중심에 이홍길(광주고 3년)이 있었다. 전날 이홍길(2024년3월3일 세상을 떠나서 5.18묘지 안장, 전남대 명예교수이자 시민운동가)은 시내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 벽보판에서 고대생의 데모를 알리는 호외를 접했다. 저녁 무렵 그의 계림동 하숙집에 홍갑기, 김신담, 김병욱 등 10여 명이 모여 19일 시위를 모의했다. 그리고 19일 목이 터져라 외칠 구호는 <'3.15 부정 선거를 다시 하라', '마산의 발포 경찰을 처단하라', '구속 학생 석방하라', '경찰은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 등이었다. 19일 아침 시위를 결의했던 학생들이 등교하자 낌새를 눈치챈 교장은 간부들과 모의 주동 학생을 불러 자중하고 대학 입시에 전념하라고 훈계했다. 이홍길을 비롯한 학생 대표들은 협의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 한 후 시간을 얻어 회의를 진행한 끝에 시위를 감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때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이미 약속한 대로 종소리에 맞춰 전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했고, 학생 대표들도 잠긴 교장실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학생들이 운동장에 집결했지만 정문은 이미 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막히자 일부 학생들은 후문을 통해 거리로 박차고 나갔다. 후문으로 나와 거리로 진출한 학생은 100여 명, 계림동 앞길로 나오자 경찰이 곤봉으로 후려쳤다. 경찰의 곤봉 세례에 광주고생들은 계림파출소와 경양방죽 쪽의 두 갈래로 나뉘어 시내로 진출,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일고, 광주공고 등 시내 고교를 찾아다니며 동참을 호소했다. 오후 2시, 금남로에는 몰려드는 고교생들로 물결을 이루었고 또한 일부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수천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 학생 의거 선배를 따르자"를 외치며 여러 갈래로 나뉘어 시내 곳곳의 파출소와 소방서를 파괴하며 경찰과 충돌했다. 그리고 광주 4.19혁명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오후8시경, 광주 학동파출소 앞에서 시위하던 강정섭(당시17세)이 경찰이 쏜 총알을 맞고 좌우상박부 관통상으로 숨졌다. 시위대들이 전대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의 몸은 이미 식어 있었다. 학생 시위대의 최대 격전지는 광주경찰서(현 동부경찰서 자리)였다. 1천여 명의 시위대가 광주경찰서로 모여들었고,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으로 이에 맞섰다. 시위대와 경찰과의 밀고 당기기를 수차례, 9시 25분경 40명의 경찰 돌격대는 시위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지만 시위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탕, 탕, 탕, 경찰의 발포로 여기저기서 시위대가 쓰러졌다. 경찰은 금남로로 후퇴하는 시위대를 끝까지 쫓아와 사격을 해댔다. 순식간에 이귀봉(당시 18세)을 비롯하여 7명이 금남로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20일 오전, 광주농고생들이 합세한 전남대생들의 시위가 있었지만 무장한 군인과 장갑차의 공격으로 해산되었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시위는 이후 목포, 여수, 순천 등 전남 일대로 퍼져 나갔다.

광주 4.19혁명 발상지인 광주고등학교 정문에는 광주 4.19민주혁명 발상지 표지판과 교정 안쪽에 광주 4월혁명 발상 기념탑 및 4.19혁명 그날 시비 등을 세워 이를 기념하고 있고, 4.19민주혁명역사관이 2019년 3월 20일 건립되어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또한 4.19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발상지인 광주고등학교 앞길(중앙초교~대인시장~광주고~서방4거리)을 '4.19로'로 지정하였고, 버스 419번이 이 구간을 운행하고 있다.

광주공원의 4.19의거 영령 추모비 전경(사진촬영 김오현)

◾️ 광주공원의 4.19의거 영령 추모비

1962년 4월 19일 광주공원에 광주 4.19의거 희생 영령 추모비가 세워졌다. 당시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고 4.19혁명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맨 중앙에 4.19를 양각하고 우측에는 4.19혁명 당시의 시위 모습을, 좌측에는 조지훈의 시를 새겼다.

자유여 영원한 소망이여,

피 흘리지 않곤 거둘 수 없는 고귀한 열매여.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맨 가슴 총탄 앞에 헤치고 달려왔더이다.

불의를 무찌르고 자유의 나무의 피거름되어

우리는 여기 누워 있다.

잊지 말자, 사람들아.

뜨거운 손을 잡고 맹세하던

아 그날 4월 19일을...

광주 4.19혁명 최초의 희생자 강정섭(17세), 고중석(16세), 김재복(18세) 등의 동판 사진과 4.19혁명기념탑 설명 내용

전국 최초로 3.15 부정 선거 무효를 외쳤던 광주 3.15 장송 시위는 진주, 마산을 돌아 다시 광주고생들이 중심이 된 광주 4.19혁명으로 타올랐다. 광주 4.19혁명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광주고 학생들이 독재정권의 부패와 폭압에 맞서 일어난 정의감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서는 군사독재에 맞서 평화로운 시위를 벌였고 민주주의 가치를 지켜냈다. 광주는 이처럼 억압에 맞서 정의를 외치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 흘린 피는 5.18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민주, 인권의 광주 정신이 된다. 이처럼 숭고한 희생과 용기를 결코 잊지 말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귀봉(18세), 박순희(21세), 김준호(19세), 장기수(19세) 등을 비롯하여 7명이 금남로에서 희생된 분들 동판 사진

🔳 참고문헌

1. 조상열, [광주 3.15의거로 인해 4.19 혁명탄생-김영용 상임대표], 문화매거진 대동문화, 2021.

2.노성태,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 - 60년 4월 19일], 전남일보, 2022.

3. 김상환, [4.19혁명],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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