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별 :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3호
▶ 명칭 : 전상의장군예장석묘(1977.10.20)
▶ 소재지 : 광주 북구 화암동 산239번지 |
🔳 전상의 장군 예장묘소
무등산의 북쪽 기슭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 산 239번지, 무등산 원효사를 가다보면 제4수원지를 지나 김덕령 장군의 충장사로 가는 중간쯤에 오르막 좌회전 도로 옆에 전상의 장군의 "충민사(忠愍祠)"가 있고, 충민사 담장 밑의 도로를 따라 쭉 들어가다 보면 안쪽 산기슭 평두산(平頭山)에 전상의 장군 예장묘소가 있다.
예장(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하는 것)묘는 국가 공신에 대한 장례로 왕릉 다음 가는 무덤이다. 이 묘소는 1977년10월20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되었다가 광주광역시로 이관되어(1986년12월16일) 광주광역시 지방기념물 제 3호로 지정되었다.
묘소에는 전상의와 그의 첫째 부인 풍천임씨 및 둘째 부인 광산김씨 전경부인 두분과 함께 3합장되어 있고, 직경 4.9m의 무덤 밑에는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1857년(철종8)에 세운 묘비가 있다.
🔳 전상의(全尙毅) 장군
전상의(全尙毅; 1575-1627)는 고경명, 김덕령에 비해 너무도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선조 8년(1575), 광주군 도천면(현 광주광역시 구동 또는 봉선동)에서 전용(全蓉)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희원이고 호는 구성이며 본관은 천안이다.
한때 그의 집안은 명문이었다. 5대조인 구생은 광주목사를, 7대조인 영좌는 전라도관찰사를 그리고 8대조인 익은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으며, 할아버지만이 기자전 참봉을 역임했다.
본관은 천안(天安)으로 1603년(선조36)29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주부, 평안북도 강계도호부사와 경기도 덕포첨사 등 여러 벼슬을 거쳐 1617년(광해군9)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건너가 협상 끝에 임진왜란 때에 포로로 끌려간 1,500여명의 동포를 송환해 왔다.
1618년(광해군10)에는 정3품인 내금위(內禁衛)어모장군(禦侮將軍) 겸(兼) 사복장(司僕將)에 임명되어 광해군의 가장 총애 받는 무관으로 봉직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은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반정을 일으킨 서인 편에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안도 개천군수(종4품)로 좌천되었기 때문이다.
1625년(인조3)에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도호부사(都護府使) 겸(兼) 좌영장(左營將)으로 부임했다. 2년 후 1627년(인조5)에 후금(後金, 淸)태종이 3만 대군으로 침입한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01월17, 18일 양일간의 안주성 싸움에서 평안도 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 1540-1627), 안주목사 김준(金浚; 1582-1627)과 더불어 용전분투한 결과 적군을 모두 격퇴시키는 대첩(大捷)을 거두었다.
그러나 퇴각했던 적병이 3일만에 다시 밀물처럼 몰려와 중영(中營)이 함락되고 남이흥, 김준이 모두 전사하자 전 장군은 중과부적으로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장졸들에게 “이곳을 피하여 목숨을 도모하라” 명하고는 홀로 백상루(百祥樓)에 서서 남은 화살을 모두 쏘고 칼을 뽑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절한 인물로 고경명, 김덕령과 함께 광주 삼 충신 중의 한 사람이다.
의연한 장군의 모습에 감동한 오랑캐들도 “충신열사의 주검은 소중하게 모셔야 한다”하여 백상루 앞에 묻어 팻말을 세워 두고 갔다고 한다. 1627년01월21일, 그의 나이 53세였다. 그는 정치적 박해로 좌천되었지만 후금의 군대와 끝까지 맞서 싸웠다. 그가 순국하자 인조5년(1627)02월04일, 비변사는 증직 구휼하는 은전을 내려 격려 권장하라는 주청을 올렸다. 02월07일, 그에게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관직이 높여졌으며, 그리고 그해 07월26일, 그의 시신을 모셔다가 무등산 아래 평두산(平頭山)에 장지를 정했다.
국왕은 예조정랑 임련을 파견하여 예장으로 장례 지낸 후 사폐지 30리를 하사하여 그 충절을 기렸다. 그 후 숙종 8년(1682)에 안주 충민사에 배향되고, 숙종 10년(1684)에 충신정려가 내려졌다.
그러나 그에 대한 사후 추증 및 사당에 배향은 당시 안주성 전투에 참여했던 남이흥과 김준 등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같은 서인인 남이흥과 김준은 곧바로 안주 충민사에 주벽으로 모셔졌지만, 인조반정의 반대편에 섰던 그는 주벽에서마저 밀려나고 시호조차 내려지지 않았다. 광주 포충사에 합사하라는 명이 내려졌지만, 주벽의 후손들이 거부해오다 헌종 15년(1849년)이 되어서야 광주 경렬사와 제주의 귤림서원에도 배향되었으나, 고종5년(1868)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985년 광주 무등산 자락에 충민사가 준공되어 단독 배향되었다. 그가 순절한지 358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아직도 광주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관심도 없고 알지 못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전상의(全尙毅) 장군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겨 본다.
◾️참고문헌
1. 김영헌, [광주의 산], 심미안, 2017.
2. 광주광역시, [광주읍지], 태양사, 1990.
3. 박선홍, [무등산], (재)광주광역시 광주문화 재단, 2013(증보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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