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민사(忠愍祠) 전상의(全尙毅)장군에 얽힌 오해와 진실

전상의(全尙毅) 장군, 이제는 광주를 대표하는 3충신으로 광주에 자랑이어야 한다.

김오현 시민기자 승인 2023.04.10 08:49 | 최종 수정 2023.04.10 09:03 의견 0

충민사 전경

🔳 충민사 [忠愍祠]

『광주읍지』의 「충신전」에는 총 14분의 충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던 고경명과 김덕령, 그리고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순절한 전상의 장군만이 나라로부터 충신의 정려를 받고 있다. 이 세 사람만이 충신의 정려를 받았기 때문에 광주의 3충신으로 불린다.
충민사는 조선시대 중엽의 무신(武臣) 전상의(全尙毅; 1575-1627)를 배향한 사우이다. 이 사우는 전상의장군 유적보존회가 주도한 가운데 1982년 6월 28일에 착공하여 1985년 10월 21일 완공했다. 충민사에는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사우와 내삼문인 수의문(守義門)와 외삼문인 창의문(彰義門)이 있고 경내에는 정려각과 유물관, 「전상의장군유적기념비;1985년 1월 22일 세움」가 있다.

충신 정려 현판

정려각은 원래 광주광역시 동구 지원동 골뫼(화산; 花山)마을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훼손되어 이곳에 복원했는데 내부에는 ‘충신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행통훈대부 구성도호부사 전상의지려(忠臣 贈資憲大夫 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行通訓大夫 龜城都護府使 全尙毅之閭, 숙종10년, 갑자(甲子), 1684년)’란 명정(銘旌)편액이 있다. 정려가 있었던 지원동 골뫼마을에는 1982년 6월 28일에 「충민공전상의장군정려각유허비(忠愍公全尙毅將軍旌閭閣遺墟碑)」를 세웠다.

유물관 전경(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유물관에는 유물 복제품과 교지(敎旨), 완문(完文), 구성집(龜城集; 1735년 간행),구성공실기(龜城公實記; 1855간행), 기록화 등이 보존ㆍ전시되어 있는데 이중 교지 등 진품은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충민사 입구에는 1979년 8월 24일에 세운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비문은 1851년(철종2)에 대사헌(大司憲)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66-1852)이 지었고 전면의 큰 글씨는 근원(槿園) 구철우(具哲祐)가 썼으며 50자 26줄로 된 작은 글씨는 강인환(康仁煥)이 쓴 것이다.

🔳 충민사에 얽힌 오해
영ㆍ정조때 실록 찬수관 이었던 광주 사람 전의(충남 연기)이씨 이엽(1729 - 1788)선생의 꿈에 나타나 고경명과 김덕령은 사당에서 제사를 받고 있는데 자신은 지금까지 받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고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도록 소원했다고 한다. 그래서 광주에 낙향 해서 유림들과 회의를 거쳐 포충사에 모시기로 했으나 포충사(고경명 장군)는 신주를 모실 공간이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우여곡절 끝에 헌종 15년(1849년)이 되어서야 광주 경렬사(정지 장군)와 제주의 귤림서원(배향된 까닭은 제주도에도 천안전씨가 많이 살고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에도 배향되었으나, 고종5년(1868)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신도비(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100년이 지난후 먼저 김덕령 장군의 충장사가 1974년 광산김씨 낭장공파를 중심으로 '충장공김덕령장군유적보존회'로 개편하면서 본격적인 충장사 착공에 들어갔고 이듬해인 1975년 2월에 완공했다. 이에 전상의 장군을 숭모하는 뜻있는 지역 인사들도 1975년 '전상의장군유적보존회'가 만들어졌으나,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가 1979년도에 와서야 비로소 광주 삼 충신(고경명, 김덕령, 전상의) 중 유일하게 전상의 장군만이 사당이 없으므로 1979년 8월 24일 사단법인 '전상의장군유적보존회'가 중심이 되어 북구 화암동 입구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유적 정화사업으로 1982년 6월 28일 사우건립에 착수하여 1985년 10월 21일 무등산 자락에 전상의 장군을 기리는 충민사가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충민사 사당(사진촬영 이병봉)

여기서 충민사 건립배경과 관련한 일부 광주시민과 국민들 사이에 "왜곡과 오해"를 바로 잡고자 한다. 전두환 정권 시절 서울 인사동에 장군의 유품이 나오자, 담당자는 그 유품을 당시 실세 행세를 하던 동생 전경환(당시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명예회장으로 이른바 소통령으로 불렀다고 함)에게 보낸다. 전경환은 유품을 확인 해본 결과 자기 조상인 완산(전주)전씨 유품이 아니고 천안전씨인 전상의 장군의 유품이므로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게 된다. 그리고 1985년 10월 21일 완공된 전상의를 기리는 충민사 안에 유물관이 만들어지자 기증자 전경환의 이름으로 유품의 일부가 충민사에 보내진다. 이를 계기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이름이 들어간 공적비가 건립되자 광주 시민들의 분노를 사 공적비가 박살나는 상황에 이르렀다.

공적비(사진제공 투데이 전남광주 정성환 기자)

전상의 장군을 기리는 충민사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때 기획했던 것인데, 여러가지 여건상 차일피일 미루다가 하필 5.18 민주화 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시기와 맞물려 전상의장군 유적 보존회가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추진했던 결과로 건립 시점과 공적비 등이 문제가 되어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사실 충민사는 전두환과는 관계없이 국비 지원은 한 푼도 없이 오직 도비와 시비로만 사당 건립이 계획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충민사에 들르는 탐방객도 거의 없고, 들르는 사람들도 전상의 장군을 전두환의 조상으로 잘못 알고 있고, 또한 전상의 장군이 태어난 광주지역 사람들 조차 그가 누구인지 어떤 업적이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현실이 더욱더 안타까운 것이 현실이다.
이젠 제봉 고경명 장군, 의병장 김덕령 장군과 함께 광주를 대표하는 3충신으로 광주의 자랑이길 바래본다.

◾️참고문헌
1. 김영헌, [광주의 산], 심미안, 2017.
2. 박선홍, [무등산], (재)광주광역시 광주문화 재단, 2013(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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