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령 성주사지(保寧 聖住寺址)
종 목 |
사적 제307호 |
시 대 |
통일신라 문성왕 |
지정일 |
1984. 08.13 |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절로 전사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호국사찰이었다. 백제 멸망 후 폐허가 되었다가 남북국시대 당나라에서 선종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선종의 대가인 "무염대사(낭혜 화상)와 같은 무열왕계의 후손인 김양(金陽), 김흔(金昕)" 등 중앙 귀족들과 왕족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다시 크게 일으켰고 신라 문성왕이 성주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성주사비>와 <낭혜화상비>에 따르면 성주사의 창건은 김흔, 김양 등 중앙 귀족들과 왕족들의 후원을 바탕으로 했다. 성주사는 이전 시기 김인문(무열왕의 둘째 아들)이 문무왕으로부터 삼국통일을 위하여 세운 큰 공으로 받은 보령 일원의 봉토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찰은 현재의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발발했던 김헌창의 난(822년)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소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폐기된 선대의 건물지를 활용하여 사찰 중심부의 금담, 강당 및 회랑을 재건한 흔적을 발굴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가람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회랑이 연결되어, 현재의 성주사지 영역 대부분을 회랑으로, 중심사역이 사역 동편에 치우친 특징적 형태를 보인다.
남북국시대의 신라 말기에 유행한 선종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불교 종파이다. 그리하여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아 크게 유행하였고, 선종 불교의 큰 중심지 절이 전국에 9개가 세워졌는데, 이를 9산선문이라고 한다. 이 전국 9산선문 중의 하나가 성주산문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이다. 특히 성주산문은 9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의 산문이었으며, 무염대사는 당시 최고의 선종 승려였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성주사는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말 폐사되었고, 지금은 그 터와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옛 성주사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발굴 조사 결과 중문-석등-5층석탑-금당의 불대좌-강당으로 이어지는 1탑 1금당 가람 배치에, 오른쪽은 삼천불전지, 왼쪽은 다른 불전지의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
이 터에는 국보 제8호인 대낭혜화상백원보광탑비를 비롯하여 통일 신라 시대 석탑 양식을 충실히 반영한 1개의 5층 석탑과 3개의 3층 석탑이 남아 있다.
많은 소조불 파편과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현재는 절터 만이 남아 있다.
▶ 江陵 金氏(하슬라, 명주, 강릉)
시조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5세손 김주원이다. 따라서 김알지계에 해당하는 연원이 오래된 신라계 김씨다. 현대 신라계 김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순왕을 근간으로 한 경주 김씨 및 그 분파와는 달리 신라 중대에 왕통을 이었던 무열왕의 직계 후손이다. 다만 족보상으로 김주원은 무열왕의 삼남인 김문왕(문무왕과 김인문의 동생 )의 후손으로 되어 있고 더 신빙성 있는 사료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는 김주원의 후손인 김흔이 김인문(족보상으로 후손이 끊김)의 후손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김주원은 777년에 시중이 됐고, 785년 선덕왕이 사망한 뒤 아들이 없어 여러 진골 귀족들에 의해 김주원이 왕으로 추대됐으나 정작 본인은 큰 비 때문에 수도 금성 북쪽의 알천이 범람해 건너지 못하여 화백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그 사이 왕위는 내물왕계인 상대등 김경신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그가 바로 원성왕이다. 그 후 원성왕은 김주원을 달래기 위해 명주(현 강릉시) 일대를 봉토로 주었고 후손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났음에도 그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아들들은 금성의 정계에 계속 남았다. 김주원의 아들로는 김종기(金宗基), 김헌창(金憲昌), 김신(金身)이 있었다.
첫째 김종기는 시중을 지내는 등 고위직을 역임했고, 김종기의 아들인 김정여(金貞茹) 또한 명원공(溟原公)으로 책봉되는 등 예우를 받았다. 또 다른 아들인 김장여(金璋如)는 시중을 역임하였다. 김정여의 아들인 김양(金陽) 또한 시중을 역임했으며 신무왕 옹립에 공을 세우고 문성왕 대에 권력을 떨치는 등 권신으로 유명했다. 김장여의 아들이자 김양의 사촌인 김흔(金昕)은 민애왕대 대장군을 역임했으나 신무왕 옹립 때 사촌 김양과 대립하다 패배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소백산으로 들어가 승려들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이후 김종기 계통은 후손이 끊긴다.
둘째 김헌창은 김헌창의 난(822년)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고 그 아들 김범문(金梵文)의 난(825년)이 연이어 일어났지만 실패하면서 멸족당했고 무열왕계는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족강일등).
셋째 김신의 아들은 김자사(金紫絲)였고 그 아들은 김동정(金東靖)이었으며 또 그 아들로 김영진(金英珍), 김영길(金英吉), 김영견(金英堅), 김영환(金英喚)의 4형제가 있었는데 이중 김영환을 제외한 3명의 후손이 강릉 김씨를 이어가게 되었다.
▶ 무염(無染)
속성은 김씨(金氏).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 법명은 무염(無染). 범청(範淸)의 아들로 어머니는 화(華)씨이다. 제29대 태종무열왕의 8세손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다. 또한 무염은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가서 대흥성의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 선법(禪法)을 배우고, 마곡산(麻谷山)보철(寶徹)에게서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므로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845년(문성왕 7) 귀국하여 공주 성주사(聖住寺)를 선문구산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교화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므로 그들을 피하여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등 여섯 왕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법을 물었고, 제자는 2,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원장(圓藏), 영원(靈源), 현영(玄影), 승량(僧亮),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이 그의 선풍을 선양하여 성주산문의 기반을 세웠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년)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葆光)이다. 탑은 성주산 성주사에 세웠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최인연(崔仁渷)이 쓴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있다.
▶ 김흔 (金昕)
김흔(金昕, 803년~849년)은 남북국시대 신라의 이찬으로 대장군을 역임한 관리. 장수.자는 태(泰). 태종무열왕의 9세손으로, 증조부는 상재(上宰)를 지낸 이찬(伊飡) 김주원(金周元), 할아버지는 시중(侍中)을 지낸 소판(蘇判) 김종기(金宗基), 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파진찬(波珍飡) 김장여(金璋如)이며, 김양(金陽)의 사촌형이다.
822년(헌덕왕 14) 당나라에 건너가 숙위(宿衛)하고 1년 뒤에 귀국하였는데, 이때 당나라의 목종(穆宗)으로부터 금자광록대부 시태상경(金紫光祿大夫試太常卿)의 벼슬을 받았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그가 당나라에 간 해가 825년이라 하였다.
그는 귀국 즉시 사명을 잘 수행한 공으로 남원태수를 제수받고, 그 뒤 여러번 승진하여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의 대도독에 이르렀으며, 얼마 뒤 이찬에 올라 상국(相國)을 겸하였다.
839년(민애왕 2) 정월에는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김양 등이 지휘하는 김우징(金祐徵: 뒤의 神武王)의 군사를 대구에서 방어하다가 실패하여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 뒤 소백산으로 들어가 승려들과 함께 지내다가 849년 8월 27일 산재(山齋)에서 47세로 죽었다. 그의 무덤은 나령군(奈靈郡: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에 있다.
▶ 김양(金陽)
김양(金陽, 808년~857년)은 신라의 왕족·공신으로, 자는 위흔(魏昕)이다. 족보상으로 김양(金陽)은 무열왕의 삼남인 김문왕(문무왕과 김인문의 동생 )의 후손으로 되어 있고 더 신빙성 있는 사료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는 김정여(金貞茹)의 아들 김양이 김인문(족보상으로는 후손 없음)의 후손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에 고성군태수(固城郡太守)가 되었고, 중원대윤(中原大尹)을 거쳐 무주도독(武州都督, 광주광역시) 등을 지냈다.
흥덕왕이 죽고, 균정(均貞)과 제륭(悌隆)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균정 편에 가담하여 적판궁(積板宮)에 들어가 제륭파의 김명(金明)·이홍(利弘) 등에게 저항했으나 다리에 화살을 맞아 달아나고, 균정이 이홍에게 살해된 뒤 산속에 피신하였다.
그 이듬해(837년)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이 청해진(淸海鎭)에서 장보고(張保皐)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모사(謀士)와 병졸을 모아 민애왕 원년(838년) 2월에 청해진으로 들어가 김우징과 함께 거사 계획을 수립, 3월에 5천의 군사로 거병해 무진주를 점령하고, 나아가 남원(南原)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김우징의 명령으로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한 뒤, 12월에 평동장군(平東將軍)이라 칭하며 왕경(王京)을 향해 출진하여, 이듬해인 민애왕 2년(839년) 정월 19일에는 달벌구(達伐丘, 지금의 경상도 대구)에서 민애왕이 친히 지휘하던 왕군(王軍)을 격파하였다. 이궁이었던 월유택(月遊宅, 민애왕의 별장)으로 달아난 왕은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고 거병은 김우징측의 승리로 끝났다. 4월에 김우징은 김양 등의 추대로 신무왕(神武王)으로 즉위하였으나, 석 달만에 죽고 대신 아들 문성왕(文成王)이 즉위하였다. 문성왕이 즉위한 뒤 소판 겸 창부령(倉部令)을 제수받았다가 곧 시중 겸 병부령(兵部令)으로 옮겨졌다.
생전에 당(唐)으로부터 검교위위경(檢校衛尉卿)이 제수되기도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으며, 죽은 후 문성왕에 의해 서발한(舒發翰, 신라 때 십칠 관등 가운데 첫째 등급. 진골만이 오를 수 있음)이 추증되고, 부의(賻儀, 초상집에 부조로 보내는 돈이나 물품)와 장례를 모두 김유신(金庾信)의 구례(舊禮, 예로부터 내려오는 예법)에 따르게 하는 등 신라 조정은 그에게 특전을 베풀었다. 12월 8일에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능렬(陵列)에 배장(陪葬, 본 무덤 옆에 딸린 종속 무덤)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김양의 지방관으로서의 행적에 대해 "가는 곳마다 칭송하는 소리가 많았다"고 읊었으며, 직접 출병한 민애왕의 왕군(王軍)을 격파한 뒤 김양 자신은 기병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돌면서 "본래는 원수를 갚으려 한 것이고 지금 그 괴수가 죽었으니 귀족 남녀와 백성들은 마땅히 각각 편안히 거처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오!" 하고 외치고 다니며 민심을 안정시키려 했고, 앞서 적판궁에서 자신에게 활을 쏘아 넓적다리를 맞춘 희강왕의 부하 배훤백(裵萱伯)에 대해서도 "개는 제각기 주인 아닌 사람을 향해 짖는 법인데 너는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다. 내 더는 묻지 않겠으니,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등 사적인 보복을 금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최보는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사론에서 "신라의 인물로서 영웅 호걸은 김유신만한 이가 없고, 명백정대(明白正大)하기로는 김양만한 이가 없다."는 평가를 남겼지만, 안정복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장보고가 죽을 때 국상(國相)을 맡고 있던 김양이 장보고를 위해 한 마디 변명조차 해주지 않았다며 "자신과 세력과 명성이 대등했던 그를 꺼려서가 아니었겠는가?"라 비난하고 있다. 그의 행적에 있어서 단순한 도성내의 정변이 아닌 지방을 거점으로 한 장기간의 군사 행동으로 중앙 정권을 쓰러뜨렸다는 점, 성수(星宿)의 이변(異變)에 불과한 것을 '낡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시행하려는 징조'라 하여 민심을 이용했다는 점, 왕군 격파 후에 보복 금지로 민심 안정을 꾀했다는 점 등이 주목할 만하다.
▶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大朗慧和尙塔碑)
종 목 |
국보 제8호 |
시 대 |
통일신라시대 |
지정일 |
1962.12. 20 |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8 |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년)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 헌덕왕 13년(821년)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년)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년)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년)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남북국 시대 신라에서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후기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 참고문헌
1. 권태원, [성주사지의 사략에 관하여], 호서사학회, 1992.
2. 황의호, [보령 문화재], 보령문화원, 2023.
3. 최응천,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자료], 문화재청,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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