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창안한 조선의 인재 양성 시스템 : 독서당

-집현전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사가독서'를 하게 한 게 효시
-조선의 주요 인재를 양성하는 전문 기구
-350여년 간 존속되어 48차에 걸쳐 320여명 선발

이필열 승인 2024.04.03 08:13 | 최종 수정 2024.04.07 19:22 의견 0

조선시대에 세종이 만든 ‘독서당’이라는 국가의 인재양성 기관이 있다. 당시 세 곳의 한양 호수의 이름을 따서 호당(湖堂)이라고도 불렸다. 옥수동 한강 주변에는 동호(東湖), 용산 근처에는 남호(南湖), 마포 주변에는 서호(西湖)로 불리었다. ‘독서당(讀書堂)’은 조선 세종이 학자 양성 및 국가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건립한 전문 독서 연구기관이다.

3대 독서당으로 불렸던 동호독서당이 옥수동에 있다. 성동구 옥수동 공공복합청사 5층에 '동호독서당'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세종은 1426년 12월에 젊은 문신들 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처음으로 실시 하였으며, 1442년에 진관사에서 독서하게 한 것이 그 시초였다.

성종 23년 1492년에는 용산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 하였다. 중종은 인재양성과 독서를 적극 장려하며 1517년에 ‘두모포’ 정자를 고쳐지어 독서당을 설치하고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고 하였다. 당시의 동호독서당(東湖堂)이 있던 터에는 지금은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독서당터’였음을 증거하는 표지석만 있다. ‘독서당터’ 표지석 옆에는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글이 있어 옮겨본다. ‘독서당터는 조선 시대 때 국가의 주요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젊은 학자들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던 독서당이 있었던 곳이다. 일명 호당(湖堂)이라고 하는데 원래 독서당은 세종 8년(1426년) 집현전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사가독서를 한 것이 그 효시였다.’

34세의 율곡 이이는 동호독서당에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었다. 독서당에서 책을 읽고 제출해야 하는 월과(月課)로 지은 글을 묶어서 펴낸 것이다. 조선시대 전기와 중기에 이황, 이수광, 유성룡 등 당대를 대표하던 학자들 모두 이곳 독서당을 거쳐간 대학자 들이다.

조선시대 뛰어난 선비들에게 특별 말미를 주어 글을 읽게 한 '동호독서당'이 있던 터에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옥수동 극동아파트 정문 오른쪽 화단 내에 위치해 있다

독서당의 운영에도 국가의 지원이 특별했음을 책이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역대 왕들의 독서당에 대한 애정과 우대는 극진 하였다. 독서당은 국비로 운영하였으며 왕들의 하사품이 경영의 보조 역할을 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좌의정을 지낸 심수경(沈守慶)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도 독서당에 대한 기록이 있다. ‘독서당은 세종 때 창설하였는데, 젊은 사람 가운데 문장에 능숙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오랫동안 휴가를 주어 강학에 전념하게 하는 장가독서(長暇讀書) 제도 였다. 중종 때에는 동호변(東湖邊)에 집을 짓고, 관에서 모든 물건을 공급하여 총애가 유달랐다’

조선의 세종, 성종 그리고 중종은 독서당을 통하여 인재양성과 독서경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성공을 거둔 국왕들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독서당은 복구되지 못했다. 인조반정뒤에 일어난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으로 사가독서제는 정지되고 독서당의 기능도 움츠러들었다. 독서당은 영조 때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정조 때 규장각이 설치됨에 따라서 완전히 그 기능이 상실되었다.

국비 운영의 사가독서 제도는 세종이 시작한 1426년부터 1773년 까지 350여년 동안 총 48차에 걸쳐 320인을 선발하여 글 공부에만 전념 하도록 휴가를 주었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국가 시스템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600년전에 이미 나라의 인재 개발을 위하여 창안하여 시행한 제도를 본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제도를 더 승화하고 발전된 시스템으로 만들어 시행해야, 우리들의 조상이나 미래세대 들에게 면목이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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