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구 사근동 고갯길에서 백호를 잡은 남이장군 - 장군의 은공을 기려 사근동에 사당을 세움

- 1790년 경 남이장군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사당을 세움
- 지금은 사당은 없어지고 이곳에 '남이장군 사당터' 표지석만 세워져 있음

이필열 승인 2024.05.09 22:23 의견 0

남이(1441~1468) 장군은 세종 23년에 태종의 외손자로 태어났다. 총명함과 용맹함을 갖춘 장군은 불과 17살의 나이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26살 때에는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였고, 여진족을 격퇴하여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28살이 되던 해에 반대파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적의 혐의를 받아서 예종 임금에 의해 처형 당했다. 억울하게 죽은 남이 장군은 처형을 당한지 350년이 지난 순조18년(1818)에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북정가(北征歌)는 남이 장군의 대표적인 시로 남자의 호쾌한 야망이 들어있는 시이지만, 한편 그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는 시로 알려졌다. 모함자인 유자광은 시의 한 구절인 ‘男兒二十未平國’을 ‘男兒二十未得國’으로 즉 ‘平’자를 ‘得’자로 고쳐 임금인 예종에게 고함으로 남이 장군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의 물은 말에 먹여 다하리

男兒二十未平國: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

1790년경에 사근동에 세워졌던 남이장군의 제사를 지냈던 사당의 모습


조선 세조 때에 남이 장군이 사근 고개를 넘어 지나간다는 소식이 사근동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왔다. 당시의 사근동은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고갯길이었으며 인근의 아차산과 연계해 있고, 망우산과 불암산을 거쳐 수락산, 도봉산 그리고 삼각산으로 이어진 깊은 숲길이었다. 아차산에 사는 호랑이가 사근동 고갯길을 넘어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을 헤쳐서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고 있던 중이었다. 애민사상(愛民思想)이 투철했던 남이 장군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호랑이가 사람들을 해친다는 이야기와 무서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보고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사흘 동안 사근동 마을에 잠복하고 있던 장군은 드디어 백호(白虎)와 한바탕 육탄 싸움을 벌인 끝에 백호를 그 자리에서 내동댕이쳐 죽였다.

남이 장군의 사당이 세워졌던 자리에 지금은 '남이장군 사당터'의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사근동 마을 사람들은 남이 장군과의 이런 오래된 인연으로, 남이 장군이 유자광 등의 반대파의 모함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 장군의 은혜와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사근동에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왔다고 전해진다. 사당을 세운 연대는 ‘성동구지’에 따르면 179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당의 위쪽 언덕에는 ‘충무공남이장군지비(忠武公南怡將軍之碑)’라고 쓴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성동구지’의 기록과는 달리 사당이 존재하지 않고, 사당이 있던 자리에는 공영주차장이 있고 ‘남이장군 사당터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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