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의 역사와 현재적 가치

윤명철 논설위원 승인 2024.07.27 15:25 의견 0

https://youtu.be/_RqhRUiPRhI?si=GG-HAsNuwySI-M5a

경기만 유역의 북부를 놓고 백제와 고구려는 당연히 싸웠을 것이다. 백제는 386년에 대대적인 관방시설을 설치하여, 청목령에서 북으로는 팔곤성 그리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 후 고구려가 394년(광개토왕 3)에 국남 7성을 축성한 것은 황해도 남부해안지대를 강화할 목적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지방에는 배천 치악산성, 연안 봉세산성, 해주 수양산성, 옹진 고성 등 고구려 산성들이 있고 그외에 시대를 알 수 없는 산성들이 많이 있다. 최창빈은 이 성들을 당시에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그가 비정한 국남 7성의 위치를 보면 모두 해안방어시설의 성격을 겸하고 있다. 평양성 공방전과 양국의 격돌이 중부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일련의 사실들은 양국이 남북으로 각각 진출하면서 격돌하였으며, 그것은 지정학적인 조건과 전략상으로 보아 해상권쟁탈의 성격도 있었음을 알려 준다.

해양의 중요성은 양국의 대중국외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백제가 중국과 교섭을 할 때, 이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면 자유롭게 바다로 나갈 수 없다. 반면에 경기만을 장악하면 바로 위에 있는 옹진군, 장연군의 장산곶 등의 움직임까지 제어할 수 있다. 장연의 곡도(백령진) 등은 한때는 고구려 소속이었는데 등주(산동)의 어부들이 경유하고 중국의 배가 국경을 범하여 들어오면 반드시 먼저 이곳에 이르렀다.(󰡔증보문헌비고󰡕 34권,35권 등) 그만큼 대중교통의 요지였다. ( 윤명철 (고구려해양사연구)에서.......................... 932년에 들어서자 후백제의 해양활동은 다시 활발해졌다. 9월에 견훤은 相貴를 거느리고 예성강에 침입하여 鹽 白 貞의 3주의 선박 1 백 척을 불사르고, 猪山島의 목마 3 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왕건 세력의 핵심해역에 들어와 수군을 궤멸시킨 것이다. 903년에 고려에게 당한 금성급습작전을 복수한 것이다. 이어 10월에는 해장군인 尙哀를 보내 大牛島 등을 공략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왕건은 유금필을 보내면서 6년간 해로가 막혔다고 하였다. 후백제가 해상 제어권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 밖에 (고구려해성 연구 ) 등의 책이 있습니다. 아마도 30년전 쯤 백령도 자체에 대한 논문을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이재석 교수)가 백령도에서 주최한 쎄미나에서 발표했습니다.

후백제가 서해중부 해상에서 해상활동을 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 있다. 즉 삼국유사의 居陀知조에는 항해설화가 있다.진왕의 막내아들인 阿湌인 良貝를 당에 보냈는데, 이때 백제(후백제)의 해적이 津島에서 가로막는 다는 소문을 듣고 궁사 50명을 뽑아서 따르게 하였다.

배가 鵠島(백령도)에 이르렀을 때 풍랑이 크게 일어나 십 여 일 동안 머무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윤명철, 한국해양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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