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우리의 허기를 달래주었던 구황작물 고구마!

- 백성들의 굶주림에서 구한 조선시대의 구황작물 고구마
- 점심 대신 고구마를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5.01.04 10:59 의견 0

우리나라에 고구마를 들여온 문익공 조엄선생 동상과 먹거리가 드물던 시절에는 밥을 대신해서 먹던 구황작물 고구마(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조선시대는 잦은 기근과 식량 부족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웠던 시기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구마는 가뭄이나 병충해에도 강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구황작물로 큰 역할을 했다. 고구마는 흉년이 들면 곡식 대신 먹을 수 있는 귀중한 식량이었으며, 흉년을 대비한 비상식량으로도 활용되었다.

1965년부터 1970년대 말까지 무안, 함평, 해남 지역에서는 고구마를 썰어서 말린 절간고구마를 수매하여 주정을 뽑아 희석식 소주제조에 사용

1965년부터 1970년대 말까지 고구마농사는 주로 구황작물의 역할보다는 알코올의 제조원료로도 많이 쓰였는데 고구마를 썰어서 말린 절간고구마를 수매하여 주정을 뽑아서 희석식 소주를 만들었다. 하지만 1980년부터 값싼 수입산 타피오카가 들어오면서 고구마는 설자리를 잃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고구마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먹거리가 드물던 시절에는 주식대신 먹던 간식이었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찐고구마보다는 군고구마, 고구마피자나 우유쉐이크 정도에 호응하는 정도라고 한다.

조선전기 까지는 주로 마(麻)나 도토리(橡实, 상실) 같은 것을 구황작물로 사용하고 있었다.


▶ 구황작물(救荒作物)

구황작물(救荒作物)이란 농사를 할 때에 장마나 가뭄, 천둥 번개 등등 자연재해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으면서도 척박한 땅에서도 키울 수 있는 작물을 뜻하는데 예로부터 흉년이나 자연재해로 인해서 한 해 농사가 망치게 되었을 때에는 주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구황작물(救荒作物)은 훌륭한 대안 먹거리이기도 했다고 한다. 구황작물(救荒作物)은 아마 흉년이 심해 벼(禾, 나락)를 키우기 어려울때 척박하고 기후가 안좋은 상황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들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감자, 고구마, 콩, 옥수수 등을 말한다. 그중 감자가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감자, 고구마 같은 작물은 신대륙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조선 후기에 들어온걸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麻)나 도토리(橡实, 상실) 같은 것을 구황작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이 새롭게 소개되면서 식량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고구마는 상품성이 높아 종자가 비싸졌고, 재배가 까다로워 감자보다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쌀 수탈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고구마와 감자는 귀중한 대체 식량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고구마가 조선에 전래된 경위는 영조 때 통신사로 간 조엄(趙曮)이 대마도(對馬島)에 들러 그종자를 얻어 동래(현 부산)와 제주도에서 시험 삼아 심게 된 이후부터이다.


▶ 고구마(甘藷, 감저)

고구마 기원의 중심지는 멕시코와 콜롬비아 등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페루의 고구마 잔존물이 기원전 8,000년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본다. 아스텍, 마야, 잉카 문명의 사람들이 주로 재배했으며 품종도 개량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6세기 초반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전달되면서 대항해시대의 산물이 되었다. 일명 '콜럼버스의 교환'에 의해 신대륙에서 구대륙으로 유입된 새로운 작물이다. 이것이 16세기(1571년) 후반 스페인에 의해 필리핀을 식민지화 하면서 이 과정중에 고구마가 멕시코에서 직접 아시아에 전달되었고, 이후 점차 전세계로 보급되면서 감자, 옥수수와 함께 대표적인 구황작물이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 고구마를 들여온 문익공 조엄선생 영정과 '해사일기', 원주 묘역 전경,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구마가 조선에 전래된 경위는 조선시대 영조 39년(1763년) 통신사 조엄(趙曮)이 일본에 가는 도중에 대마도(對馬島)에 들러 그종자를 얻어 동래(현 부산)와 제주도에서 시험 삼아 심게 했는데, 월동방법을 자세히 몰라 모두 얼어 죽었다. 1764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강필리(姜必履)가 이 사실을 듣고 대마도 사람에게서 다시 고구마 종근(種根)을 구하여 동래와 절영도(부산 영도)에 심게 하고 그 재배법을 기록한 '감저보(甘藷譜)'라는 한국 최초의 고구마 전문서를 발간했고, 고구마 재배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고구마는 조선 초기 본초강목(本草綱目)과 같은 중국 문헌에 통해 감저(甘藷)로 알려져 있었다. ‘고구마’라는 이름은 일본어에서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마 전래 기록은 조엄의 해사일기(海槎日記)를 근거로 하고 있다. 1764년 6월 18일의 일기에 "작년에 고구마를 부산으로 보냈다"고 적혀있다. 1763년에 조엄이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가 지내면서 쓴 해사일기(海槎日記)에 또다른 기록을 보면 ‘이름은 감저(甘藷)라 하는데 효자마(孝子麻)라고도 하며 일본 발음은 고귀위마(高貴爲麻)이다'라고 쓰여져 있다. 이는 대마도 방언을 기록한 것으로, 지금도 쓰시마 지방에서는 고구마를 고코이모(효행우, 孝行芋, こうこいも)라 부른다. 19세기 초 청나라에서 들어온 감자를 '북방에서 온 감저'라는 뜻의 북감저(北甘藷)라고 부르면서 감자와 고구마의 이름은 서로 혼용되었다. 고구마는 감저(甘藷), 감서(甘薯), 남감저(南甘藷), 단감자 등으로 불렸다. 1925년에 발표한 김동인(金東仁)의 단편소설 ‘감자’는 고구마를 부르는 말이었다. 현재도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감저’라고 부르고, 감자는 ‘지슬’(地實, 지실)이라고 부른다.

고구마 재배를 위한 다양한 과정들...

조선 시대에는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이 잦았다. 특히 흉년이 들면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조엄(趙曮)은 이러한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고, 대마도(對馬島)에서 고구마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가져와서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구마는 먹거리가 드물던 시절에는 주식대신 먹던 간식이었고 우리 곁에 함께해 온 소중한 구황작물이었다. 앞으로도 고구마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식탁을 풍요롭게 하고, 건강한 삶을 위한 귀중한 식재료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1965년부터 1970년대 말까지 고구마를 썰어서 말린 절간고구마를 수매하기 위한 과정들의 모습
다양한 종류의 고구마 삶은 고구마와 구운 고구마


🔳 참고문헌

1. 윤종채, [고구마], 전주일보, 2014.

2. 새끼깜코, [채소가 자라는 시간 고구마], 새끼깜코의 묘한 라이프, 2023.

3. 리치승승파, [농산물 고구마], 네이버블로그 식품연구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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