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 된 우리 근대문화유산 4

중명전, 왕조의 비운을 응축한 빛의 궁전

김지연 시민기자 승인 2024.09.20 15:37 의견 0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극장 옆골목으로 접어들면 점심 때 문전성시를 이루는 남도 추어탕집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 골목 끝으로 다다르면 철문 뒤에 붉은 벽돌 아케이드로 이루어진 근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아담한 규모지만 위풍당당하고 우아한, 아마 정동에서 가장 독특하고 이국적인 근대건물일것이다.

덕수궁 영역에 위치했던 중명전. 원래는 황실 도서관이자 접견실인 수옥헌이었다.

서양식 건물임에도 건물 전면에 한자로 쓴 현판도 붙어있다. 건물의 이름은 중명전(重眀殿). “광명이 넘치는 궁전”이란 뜻을 지녔지만 이 건물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수차례 벌어진 장소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과 1907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헤이그에 특사를 보냈다는 이유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 당했던 비운의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 곳이다.

1904년 4월 14일 경운궁(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전소된 궁궐의 모습. 당시 고종은 수옥헌(현 중명전)으로 피신했다. 당시 여러 정황상 화재의 범인은 일본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돌았다.

건물의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다. 1900년 경 대한제국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졌다. 일제강점기 때 도로를 내면서 궁의 규모가 쪼그라들었지만 중명전 일대도 당시 경운궁이라 불리던 덕수궁 영역이었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잔인하게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그 유명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그 후 1년 뒤인 1897년 10월 12일. 러시아 공사관에서 절치부심하며 새로운 자주 독립국 건설이라는 청사진을 그렸던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을미사변의 끔찍한 악몽이 서린 정궁 경복궁 대신 경운궁을 수리하고 새로운 전각들을 신축하고 궁 영역도 확장해서 새 나라 새 궁전에서 새 출발을 하려던 참이었다.

1904년 경운궁에서 원인 모를 큰 불이 난다. 왕의 집무실 중화전은 물론 침소인 함녕전마저 소실되는 등 대부분의 전각들이 사라져버렸다. 하는 수 없이 황태자 순종을 데리고 도서관 건물인 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왕이 기거하는 곳은 ‘전’이라고 칭해야 해서 집의 이름이 중명전으로 바뀐 것이다.

중명전에 전시된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문서


중명전 내부로 들러서면 1층에 제1실 ‘덕수궁과 중명전’, 제2실 ‘을사늑약의 현장’, 제3실 ‘을사늑약 전후의 대한제국’, 제4실 ‘대한제국의 특사들’ 등 총 4개의 방으로 구성됐다. 각 전시실에는 을사늑약 문서와 늑약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의 친서, 헤이그 특사에 관한 자료들을 전시해 이곳이 긴박한 역사의 현장임을 강조했다. 고종의 집무실이었던 2층은 현재 문화유산국민신탁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중명전 제2실에 전시된 을사늑약의 현장


특히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2실이 가장 인상적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물론 을사늑약에 찬성한 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박제순과 이에 반대했던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이 회의하는 모습이 밀랍인형으로 정교하게 재현되고 있다.

2017년 2번째 복원을 통해 을사오적들은 친일인명사전에 그 오명이 남을 뿐 아니라 정교한 형상으로 길이길이 남게 되었다. 이렇게 실물 크기의 밀랍인형까지 구비해 놓으니 그날의 치욕스러운 현장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어디 있을까 싶다. 친일파 후손들 입장에선 못마땅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다 매국행위에 대한 인과응보가 아닐까.

헤이그 특사의 주역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제4전시실로 들어오면 중명전에서 일어났던 또 하나의 큰 사건인 헤이그 특사파견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을사늑약이 체결 된지 2년 후, 고종은 이를 무효화 시키려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했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그 주인공들이다.

세 명의 특사는 을사늑약은 부당하고 대한제국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알리려고 한국인 중 거의 최초로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달렸다. 하지만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횡행하는 국제무대에서 대한제국은 이미 제국주의 시대의 격랑을 넘지 못한 난파선이었고 버려진 카드였다.

중명전 내부에 전시된 고종황제의 옥쇄. 을사늑약 당시에 찍었던 도장은 고종황제의 옥쇄가 아니라 외무대신의 직인을 훔쳐다 찍은 것이라서 고종황제는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했다.

결국 세 명의 특사 중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준은 특명의 실패로 인한 좌절감에 호텔에서 분사(憤死)했고 이상설은 연해주로 건너가 해외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다 1917년에 이역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23세의 나이에 통역을 담당했던 이위종은 고종황제에게 등 돌린 러시아 황제에게 앙갚음하기 위해서였는지 러시아혁명 당시 적군(赤軍)에 가담해 짜르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하다 실종됐다고 전해진다.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중명전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고 순종이 그 뒤를 이었다. 퇴위 후 고종은 덕수궁으로, 순종은 창덕궁으로 뿔뿔이 흩어져 주인을 잃은 중명전은 점차 그 입지가 쇠락한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외국인 사교클럽으로 쓰이다가 1925년엔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되어 재건되었다.

복원 이전의 중명전의 모습. 앞마당은 정동극장 주차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나무위키.


광복 후에는 국가재산으로 귀속되었다. 1963년에는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보금자리로 옛 왕실 가족에게 환원되었다가 민간에 매각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까지 발코니는 막혀버리고 벽면은 흰 페인트로 덮이고 마당은 정동극장 주차장으로 쓰여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옛 궁전의 정취는 찾아볼 수 없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2007년 페인트를 벗겨내고 옛 모습으로 복원한 후 2010년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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