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정동은 그리 접근하기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80년대만 해도 항상 덕수궁 돌담길엔 전경들이 보였고 경비가 삼엄했던 걸로 기억난다. 80년대 초반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점거사건이 이어지고 대학가 반미 시위가 이어져 정동에 위치한 미대사관저를 철경호하다 보니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나마 정동에 사람들이 모이게 된 계기는 1994년 정동극장이 지어지고 2004년 개관한 서울시립미술관 덕분이었다.
당시 서울 도심 한복판에 미술관이 생겨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시청역에 내리면 10분 내로 닿는 서울시립미술관은 서울에서 대중교통으로 가장 접근하기 좋은 미술관이다.
시청이나 태평로 일대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도 점심 때 잠깐 들르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덕수궁 돌담길 주변에서 정동길로 이어지는 길은 예전부터 고즈넉한 산책길로 사랑받았지만 서울시립미술관이 생긴 이후로 문화가 있는 ‘고품격 산책길’로 재탄생했다.
정동에서 제법 높은 언덕 위에 위치했지만 잘 조성된 작은 숲길에 가려져 정동길에서 잘 눈에 띠지 않는 서울시립미술관. 거의 100년 가까운 시간을 품고 있는 이 건물은 앞모습부터 예사롭지 않다. 세 개 연속으로 이어진 아치형 포치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이루어져 이 건물의 유구한 시간을 증명하는 인장이다. 반면 좌우 대칭으로 펼쳐진 네모반듯한 건물은 전형적인 모더니즘 건축의 모습을 띤다. 그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건축양식이 공존해서 역사적 가치는 물론 건축학적 가치도 지닌 건물이다.
오래된 건물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곳도 처음부터 미술관 용도로 지어진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지어진 경성지방법원 혹은 경성재판소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법원이 지어지기 한참 전인 1886년에는 이 일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이 들어섰다. 이후 189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재판소인 평리원이 들어섰고 1910년 대한제국 말기에는 토지조사국이 들어서기도 하는 등 여러 기관들이 거쳐 갔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원래 서소문동에 위치했던 법원청사가 낡고 업무도 늘어났다. 3.1운동 무력진압 후 갖은 탄압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아나키스트, 민족주의자들의 숫자가 늘어만 갔다. 그래서 일제는 소위 “불령선인”들을 단죄하기 위한 재판소를 새로 짓기로 했다. 기왕이면 어디서나 잘 보일 수 있는 높은 곳에 최대한 압도적이고 권위적으로.
조선인 최초의 건축가로 알려진 박길룡이 설계한 이 건물은 당시로선 최첨단 공법인 철근 콘크리트 골체에 벽돌을 쌓고 외벽에 타일을 붙인 직사각형 모양의 모던한 3층으로 이루어 졌다. 권위와 장식적인 요소를 한방에 다 갖추고 싶었는지 중앙부 전면은 로마네스크풍의 연속 아치를 적용했다. 1928년 법원 신청사가 준공되면서 경성지방법원, 고등법원, 복심법원, 지방법원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사법 시스템은 당시 국제적인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후진적이었다. 총독부가 장악하고 있는 사법제도 속에서 검사나 판사들이 공정한 재판을 할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이들의 숫자도 극히 적었고 웬만한 권력은 경찰이 쥐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순사들은 체포한 사람을 가두고 합법적으로 고문하고 직접 재판까지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판검사보다도 순사가 더 두렵고 미운 존재였을 것이다. 미술관 벽돌, 타일 하나하나에 식민지 백성의 한(恨)이 켜켜이 서려있는 것 같다.
광복 후 경성지방법원은 대한민국 대법원청사로 환골탈태 했다. 이 무렵 옥상에 한 층을 더 올려 4층으로 증축했다. 1950~60년대에는 점차 늘어나는 업무로 인해 별관 2채를 다시 짓고 대법원과 법원행정처, 법원도서관까지 지어졌다.
1995년 10월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한동안 비어 있다가 2004년 지하 2층과 지상 3층 규모의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이듬해에 건축에 담긴 역사성과 조형성의 가치가 인정되어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제(제237호)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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