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 38호)

수몰 위기에서 벗어난 국보

원영혜 전문기자 승인 2024.12.27 05:13 의견 0
이전 전의 고선사지 삼층석탑

경주국립박물관으로 이전한 석탑과 귀부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던 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인해 절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지금의 자리인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놓은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통일신라시대 전기인 7세기 후반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전형적인 석탑양식으로 옮겨지는 초기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이 탑과 함께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에서 시작되어 이후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 석탑은 규모나 각 부의 가구수법이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거의 같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석탑의 초층 옥신 각 면에는 문비형이 돋을새김된 데 비하여 감은사지삼층석탑에는 아무런 조각도 없다는 것이다.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이 서있던 암곡동 고선사터는 경주고도 종합개발계획으로 인해 근처에 덕동댐이 건설되어 인공 호수인 덕동호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되었으며, 본 석탑은 댐 건설 전인 1975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됐다.

고선사터에는 본 석탑 이외에도 비신이 없어진 귀부를 비롯해서 일부 유구가 남아 있었는데,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학술 조사로 이 일대의 유구를 발굴하였으며 여러 유물들을 수습할 수 있었다. 기존의 다른 유구들과 발견된 유물들 역시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같이 옮겨졌다.

고선사의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기록에 따르면 고선사는 고려시대까지도 규모도 크고 번창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알 수 없는 시기에 폐사가 됐으며 폐사에 대한 기록도 현재 딱히 전해지는 것은 없다.

탑의 높이는 9m지만 이전하면서 높이가 조금 더 높아져서 현재 높이는 10.2m다.
1층의 몸돌을 크고 높게 해놓은 것에 비하자면 다른 층이나 기단의 높이는 낮아서 약간 둔한 느낌이지만, 일단 자체 크기가 상당한 거탑인지라 장중한 인상을 주고,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형태인 위로 올라 갈수록 몸돌과 지붕돌의 크기가 차츰 줄어드는 양상에 충실하여 비례감과 안정감을 준다. 본 석탑의 각 층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형 장식을 양각으로 새겨놨으며, 각 층 지붕돌들의 하단에는 5단으로 이루어진 역계단형 받침 장식이 있다.

세월의 흔적이 남아 기단과 몸돌, 지붕돌에 군데군데 부서진 부분이 있으나 대체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하지만 현전하는 대다수의 다른 탑들처럼 본 석탑도 삼층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은 소실되어 없으며 머리장식 받침 정도가 남아 있다.

석탑 1층의 몸돌은 8개의 돌로 조립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통일신라 초기~중기의 석탑에선 몸돌의 네 모서리에 만드는 기둥형 장식을 제외하면 대개 별다른 장식을 해놓지 않는 편인데, 특이하게도 고선사지 삼층석탑은 가장 초기 석탑 중 하나임에도 1층 몸돌의 4면에서 문 모양의 장식이 발견된다. 이 장식은 테두리를 2단으로 음각하여 문의 모양을 나타내어 감실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또한 문 모양 가운데에 원형으로 된 흔적 2개가 발견되는데 이는 문고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문 모양 장식의 내부 상하 모서리에 작은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문 위에 덧씌우는 장식을 붙이기 위해 뚫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 2층의 몸돌은 4개의 돌로 조립한 것으로 네 모서리의 기둥형 장식을 제외하면 특별한 장식은 없다. 1층, 2층, 3층의 지붕돌들도 모두 8개의 돌들로 짜맞춘 것으로 각 층마다 크기는 다르지만 형태는 모두 같으며 가운데에 연결선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3층의 몸돌은 1, 2층과는 제작 방식이 달라 특징적인데, 3층은 여러개의 돌을 짜맞춘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다만 네 모서리에 기둥형 장식을 만들어 놓은 것은 다른 층의 몸돌과 동일하다. 3층의 몸돌을 하나의 돌로 만든 것은 다른 층들에 비해 크기가 작아서 여러 개의 돌을 굳이 짜맞출 필요가 없으며, 이와 함께 탑에 모실 사리장엄구를 넣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고선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석탑인지라 제작 방식에서 초기 석탑 양식을 보이는데, 이는 앞서 서술된 바와 같이 여러 돌을 짜맞춰서 몸돌과 지붕돌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이와 비슷한 석탑으로는 경주 감은사지 동 · 서 삼층석탑이 있다. 감은사지의 석탑들은 현전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데, 본 석탑과 비슷한 제작 양상이 드러나며 크기도 13.4m로 대단히 거대하다. 본 석탑과 감은사지 석탑들을 조립식으로 만든 이유로는, 하나같이 워낙 큰 사이즈이기에 탑을 이루는 부재들을 하나의 거대한 돌로 만들기에는 당시로선 상당한 어려움이 있어 여러 조각들을 짜맞추는 방식으로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고선사지 삼층석탑도 선례인 감은사지 석탑들의 영향을 받아 제작 방식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한다.

감은사지 석탑들에서 시작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은 본 석탑과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등을 거치면서 크기는 다소 작아지고 제작 방식은 하나의 석재로 하나의 부재를 만드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고,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이 통일신라 중기에 세워진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에 와서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주며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의 건립 연대는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본 석탑의 제작 양식이 감은사지 석탑들에 바로 이은 통일신라시대 초기 석탑 형태라는 점과 기존에 고선사터에서 발견된 서당화상비에 드러난 내용으로 추정해 볼 때 원효대사가 입적한 686년(신라 신문왕 6년) 경에 탑을 세웠을 것으로 추측한다.

대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고 그 크기도 웅장하여 석탑 자체의 아름다움도 잘 드러나며,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보임과 동시에 신라 석탑 양식의 변화 과정에서 경주 감은사지 동 · 서 삼층석탑을 잇는 가장 초기 석탑 중 하나라는 점 등의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이 인정 받아 일찍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원영혜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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