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경매회사 차이나 가디언(China Guardian, 중국명 嘉德)의 4월 6일 춘계 경매에 「진고구려귀의후(晉高句驪歸義侯)」 금인(金印)이 출품되었다. 경매 추정가는 120만~220만 홍콩 달러(원화 2억 2천~4억 1천)로 예상되며, 경매 예정인 이 금인의 출처와 수집 경위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이 인장은 진(晉)이 고구려에 수여한 것으로 추정되며, ‘귀의후(歸義侯)’라는 칭호가 새겨진 고구려 인장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당 내용은 한국고대사학회 홈페이지에 올린 고려대 한국사학과 박대재 교수의 보고를 통해 알려졌다.
「진고구려귀의후(晉高句驪歸義侯)」 금인
◇ 우리 고대사와 관련된 순금 인장으로는 최초
중량 88g의 순금으로 제작된 이 금인은 말 모양의 꼭지(馬紐)와 정교한 각인이 특징이다. 일본에서 순금제의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 인이 발견된 데 반해, 국내에서는 은제, 동제 등의 고대 인장만이 있었을 뿐이라 이번에 순금 인장의 발견은 고대 인장의 연구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명문이 새겨진 인장 바닥의 크기는 2.4×2.3cm로, 1956년 내몽고에서 출토된 「진선비귀의후(晉鮮卑歸義侯)」 및 「진오환귀의후(晉烏丸歸義侯)」 금인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이는 진이 주변 이민족 수장에게 ‘귀의후(歸義侯)’ 칭호와 인장을 수여한 관행이 고구려에도 적용되었음을 시사한다.
고대 중국이 이민족에게 수여한 관인 제도는 주변국 군주에게 주어진 국왕인(國王印), 내부 지배층에게 주어진 귀의왕후인(歸義王侯印), 비교적 하위 수장들에게 주어진 솔선읍군장인(率善邑君長印)의 3등급으로 분류된다. 기존에 확인된 ‘진고구려’명 인장은 총 6점이며, 모두 ‘솔선(率善)’ 계열로 하위 관직에 해당하는데, 새로 발견된 금인은 ‘귀의후(歸義侯)’라는 상위 등급의 칭호를 사용한 것으로는 처음 보고된 것이다.
「진고구려귀의후(晉高句驪歸義侯)」 금인의 명문
◇ 서진, 동진 어디에서 받은 인장인가
해당 금인을 출품한 옥션의 설명자료에는 이 금인이 서진(西晉, 265~317)에서 제작하여 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유물을 학계에 보고한 박대재 교수는 동진(東晉, 317~420) 시기가 유력하다고 본다. 서진 시기의 일을 기록한 「진서(晉書)」 동이전에 고구려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반면, 고구려 고국원왕 6년(336)과 13년(343)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한 일이 있고, 장수왕 원년(413)에는 동진으로부터 ‘고구려왕’으로 책봉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하기 때문이다.
특히 서진이 북방 유목민족의 남하에 핍박받아 강남으로 건너와 새롭게 시작한 동진은 화북지방의 영토를 잃고 그 타개를 위해 외교관계에 힘썼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인장이 금인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위계가 높은 사람에게 주어졌을 것이므로 출처와 수집경위가 밝혀진다면 고구려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 책봉체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책봉과 인장의 분급은 중국의 오래된 외교적 형식이며, 주위의 여러 민족을 자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다루는 한 방식이었다. 이것을 현대의 눈으로 봐서 '지배-종속'으로 설명하는 것은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오히려 4세기 이후 동진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세운 5호 16국과 겨루면서 판도가 크게 위축된 상태였으므로, 대외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 선비, 오환 등의 수장들에게 금인을 나누어 주며 우호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금인을 학계에 보고한 박대재 고려대 교수는 “이 금인이 중국 등 외국의 수집가에게 낙찰되면 다른 고구려 인장들과 마찬가지로 향후 외부 공개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이 유물에 관심이 있는 국내의 기관이나 독지가가 나서주어 학계의 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이번 금인의 발견으로 고구려의 대외 관계를 이해할 새로운 단서가 열릴지, 혹은 다시 누군가의 컬렉션 속에 들어가 세인들의 기억 속에 잊혀질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