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민 듯 꾸미지 않은 전통원림 "소쇄원 "
기아문화재지킴이 두번째 스티디활동으로 담양 소쇄원 답사를 다녀왔다.
문화재종별: 명승 제40호. 문화재명칭: 소쇄원(瀟灑園)
소재지: 전라남도 담양군 소쇄원길 17 (가사문학면)
아침 저녁으로 가끔 부는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들지만, 한낮에는 따뜻한 햇살과 아름답개 피어나는 봄꽃들이 완연한 봄을 느끼게 하는 3월14일 첫번째 스터디 장소로 담양 소쇄원을 다녀왔다.
담양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키고,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청운의 뜻을 품고 15세 때 상경하여 당시 사림들의 우상이었던 조광조(1482∼1519)의 문하생이 되어 수학하였으며 1519년 17세 때 현량과에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벼슬에 나가지는 못했다. 그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 조광조가 화를 입어 귀향을 가게되자 유배지까지 스승을 모셨다. 같은 해 겨울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벼슬길을 등지게 되었고 고향으로 낙향해 어릴 때 놀던 아름다운 계곡에서 원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세속적인 것과 거리를 멀리하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고 전하지만 그의 학문적 행적은 뚜렸하지 않다. 그가 지은 효부(孝賦)와 애일가(愛日歌)가 전하고 있다.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3)은 양산보(梁山甫) 보다 10년 연상이고, 외종형(외사촌)으로 1533년에 소쇄원에서 약간 떨어진 제월리(현 담양군 봉산면)에 면앙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이었기 때문에 소쇄원 조영에 많은 영향과 도움을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물 맑고, 시원하며 깨끗하다’는 뜻의 ‘소쇄(瀟灑)’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소쇄원 원림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4,060㎡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따뜻한 부모의 사랑과 효를 상징하는 공간)구역, 오곡문(담장 아래로 흐르는 물이 다섯번 굽이쳐 흐르는 공간)구역, 제월당(비 갠 뒤 하늘의 상쾌한 달빛이라는 뜻)구역, 광풍각(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양산보는 임종 직전에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양산보의 후손들은 그의 유언을 철저하게 지켜서 소쇄원을 지켜왔다.
그러나 정유재란때 왜군이 담양으로 쳐들어와서 소쇄원을 불질러 양산보가 지은 소쇄원은 소실되어 버렸다. 이후 양산보의 손자인 양천운이 소쇄원의 복구를 시작해서 현손인 양경지 때에 상당 부분 복구되었지만 수많은 조선 중기 학자, 문인들이 보고 즐기던 경치와 정원이 소실되고 이후에 재건된 것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게 1548년 김인후가 소쇄원 48영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꽤 자세하게 서술한 탓에 상상 정도는 가능하다는 점이며 1775년(영조31년) 소쇄원도라는 판화를 통해 소쇄원 48영과 비교할 수 있는 그림자료도 존재해서 원형 자체를 생각조차 어려운 다른 한국 내 정원양식들보다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애시당초 복원한 소쇄원이랑 여기에 나오는 48영과 비교해도 몇 개만 다를 뿐 대부분은 비슷하게 복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자료들 덕분이라고 한다.
◆ 참고문헌
1.천득염, [소쇄원, 은일과 사유의 공간], 심미안, 2017.
2.문화재청 자료 참조
ICPS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