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거울을 비춰보는 곳

심경루(心鏡樓)를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3.08.26 08:36 | 최종 수정 2023.08.27 10:43 의견 0

용호강(龍湖江)은 밀양사람들도 잘 모르는 강이다. 알고 보면 자주 지나다니는 살내(箭川), 활천(活川)이라고 부르는 강이다. 이 강은 밀양 유일의 국가 지정 명승인 월연정(月淵亭) 앞을 지난 강물이 200여 m쯤 내려오다가 동쪽으로 활처럼 굽이쳐 깊은 호수를 이루며 잠시 머물다가 금시당(今是堂)을 향하여 흘러가는 강으로, 그 위로는 거대한 활성교가 놓여있다.

옛날에는 이 강가에 배나무밭이 길게 널어져 이연(梨淵)이라 하였고, 그 가운데 깊은 소(沼)가 있어 배나무 소(沼)라고 불렀다. 그 아래쪽 장선(長善)마을 앞에 나루터가 있어 사람들이 성내(城內)에서 단장, 산외, 산내, 구 서원 쪽으로 오가는 길목이었다.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나루터와 배나무밭은 없어졌지만, 오늘도 강변 따라 환하게 뚫린 아름다운 길로는 많은 자동차와 마을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

용호강과 활성교

용호강을 가로지른 활성교(活城橋) 입구의 장선마을은 동남쪽이 확 트이고 추화산이 등을 바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로 살기 좋은 마을이다. 월연정 방향으로 가는 이 마을 끝 길가 추화산 자락의 언덕 위에 높다랗게 기대앉아 유유히 흘러가는 푸른 강물을 내려다보는 작은 누각이 바로 심경루(心鏡樓)이다. 편액을 풀이하면 ‘마음의 거울을 비추는 곳’이다. 누구를 마음의 거울로 삼아야 할진 모르지만, 길가에서 올려다보아도 강 건너편에서 보아도 자연을 사랑하고 풍류(風流)를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아담한 정자(亭子)이다.

굳게 닫힌 정문을 돌아 협문(夾門)으로 들어가 정당(正堂)을 올려 보며 이 누정(樓亭)의 내력을 살펴보았다. 정당의 명칭은 용호정(龍湖亭)이고, 정문(正門)의 이름이 심경루(心鏡樓)이다.

심경루 전경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선생의 헌시(獻詩) 시판과 밀양의 마지막 유학자 연재 손태규(孫泰奎, 1915〜2004) 선생을 비롯한 후손들의 추모시문(追慕詩文)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에 적힌 뜻을 찬찬히 살펴보니, 이곳은 우리 고장 향팔현(鄕八賢)의 한 분이신 격재 손조서(孫肇瑞) 선생의 위업을 기리고 추모하는 재사(齋舍)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격재(格齋) 선생의 생몰(生沒) 연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문중의 기록에는 1435년(세종 17)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보아 1416년생인 것으로 짐작된다.

선생의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인보(引甫), 호는 격재(格齋)로 아버지는 손관(孫寬)이며, 어머니는 김흡(金翕)의 딸이다. 안동시 일직면 송동에서 출생하여 이곳 용평리(僧伐, 섬벌)에서 성장했다. 진성(眞城, 산청 단성) 현감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던 아버지 손관(孫寬)이 조선조 태종 때 밀양으로 입향(入鄕)했다고 한다.

선생은 집현전(集賢殿)과 한림원(翰林院)에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과 함께 일하다가 단종이 즉위하던 1453년(단종 1)에 황해도 봉산군사(鳳山郡事)로 자청하여 나갔다. 1454년에 수양대군이 조카(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단종임금의 복위를 도모할 때 외직(外職)에 나와 있던 선생은 거사에는 가담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1456년(세조 2) 이 사건으로 많은 충신이 참형으로 순절(殉節)하자 봉산군사 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산림에 묻혀 살았다.

이후 조정에서 이조참판으로 불렀으나 세조가 내리는 벼슬을 받지 않고 “두견새도 나와 같아 밤낮으로 끊임없이 울고 있구나.”라는 시(詩)를 읊으며 단종을 사모하였다. 또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벗들의 충절(忠節)을 기리며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였다.

이렇듯 선생은 도학풍절(道學風節)을 존중하고 충효절의(忠孝節義)를 귀하게 여기며 입신양명(立身揚名)에 연연하지 않고 권세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 문장과 학문은 점필재와 더불어 당대 최고였으니, 한훤당(김굉필)과 일두(정여창) 등이 스승으로 모셨을 정도이다. 저서로는 심경연의(心經衍義), 근사록(近思錄), 제서연의(諸書衍義) 등을 남겼다.

먼 훗날 정조가 예조에 명하기를 “손조서(孫肇瑞)는 드높은 명망과 절조(節操)가 있는데, 어찌하여 인물 조에 올려 상세히 주를 달지 않는가?”라는 유시를 내렸다. 1812년(순조 12)에는 이조참의, 양관제학(홍문관·예문관 제학)에 증직(贈職)되고, 그 자손들에게는 잡역(雜役, 공역)을 면하게 해 주었다.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과 밀양의 혜산서원(惠山書院)에서 제향하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 주변을 보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패거리들이 온갖 그럴듯한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선량한 사람들을 우롱하고 사회의 미풍양속(美風良俗)마저 어지럽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을 심경루에서 내려다본다면 격재 선생의 심정은 어떠하실지. 9월의 붉은 배롱나무의 자태가 더욱 화려하다. 심경루의 맑고 깊은 뜻을 새기듯, 오늘도 용호강 물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흘러만 간다.

K-헤리티지 뉴스 논설위원 장창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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