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의 넉넉한 품으로 맘을 씻고

곡강정(曲江亭)을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3.09.21 21:20 | 최종 수정 2023.09.21 22:27 의견 0

쪽빛 하늘과 구절초, 주변 산야(山野)가 점차 가을빛을 더해가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밀양 사람들에게도 곡강정(曲江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55호)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그렇다 보니 정작 그곳에서 낙동강이 품은 넉넉함과 아름다운 비경(秘景)을 느껴본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주말을 이용해 곡강정을 찾았다. 하남읍 행정복지센터에서 자동차로 창녕·부곡 방면의 옛길을 따라 4~5분 정도 가면 도로 우측에 농산물공판장이 나온다. 맞은편의 목원정(식당)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들어서면 곡강 마을이다.

90년대만 하여도 이곳 큰 길가에는 횟집이 나란히 있었고 마을 안쪽에도 곳곳에 횟집들이 있었다. 인근의 수산, 인교 사람들조차 회를 먹으러 올 정도였으니 그 호황(好況)이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낙동강이 몸살을 앓고 등 굽은 고기들이 잡히기 시작하면서 이곳 사람들은 고깃배를 거둬들이고 말았다.

마을 안길을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의 검암천이 낙동강을 만나려고 함께 따라온다. 100m쯤의 개천 수문에 이르면 큰 나뭇가지 사이로 낙동강이 슬며시 겨드랑이를 드러낸다. 이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낙동강의 넓은 품이 서서히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몇 해 전까지 곡강정을 관리하던 폐허(廢墟) 된 집이 나오고, 마당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으로 팔문각(八門閣)이 나타난다. 근처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200살 넘은 팽나무가 다소 기괴하고 험상궂은 모습을 보이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낙동강의 품이 이렇게도 넓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곡강정 풍경

좌측으로 보이는 아담한 건물이 곡강정(曲江亭)이다. 결코 화려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은, 수수하면서도 단아(端雅)한 절제미가 느껴지는 정자(亭子)이다. 뒤편 언덕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300살 넘은 푸조나무가 말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곡강정은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책봉된 성산군 이식(李軾)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상주판관 이덕창(李德昌)이 1545년(인종 1년)에 건립한 건물이다. ​이 일대는 성산군(星山君)의 사패지(賜牌地,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토지)로, 곡강의 승경(勝景)으로 인하여 선비들이 즐겨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곳이다. 그로부터 2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1806년(순조 6년)에 후손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중건하고 주변의 절경을 되살려 곡강정으로 바꿨다. 곡강(曲江)이란 ‘굽이쳐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의 곡수(曲水)와 주변의 풍광을 음미하는 심경’을 뜻한다.

이식(李軾)의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자담(子膽), 호는 동파(東坡)로 무과에 급제한 후에 사복시 부정, 만도 첨사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중종 1년) 연산군의 폭정(暴政)이 극에 달하자 박원종, 성희안 등과 함께 정현왕후(貞顯王后, 성종의 계비, 중종 생모)의 뜻을 받들어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하여 공신이 되었고, 삼포왜란 진압 등에 공을 세웠다. 이후 정쟁(政爭)을 피해 이곳으로 내려와 주변의 절경과 풍치를 벗 삼으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삶을 누렸다.

곡강정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가운데 방 한 칸을 둔, 조선 후기의 정자로 사방이 트인 영남지방의 전형적 공간구성 방식을 벗어나 다소 폐쇄적인 공간구성을 취함으로써 주변의 경관을 주로 완상(玩賞, 즐겨 구경함)하는 기능을 넘어 공부하는 재실의 기능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건축의 구조 또한 화려함에 치중하기보다는 단순하고 질박한 형식으로 사랑(舍廊) 별채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곡강정동유록(曲江亭同遊錄)과 곡강정십육경(曲江亭十六景) 등의 시(詩)에는 성산군 후손을 비롯한 40여 사림들이 정자에 얽힌 사연과 주변 경관을 시적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정자의 헌함(軒檻, 좁은 마루)에는 “만사무심일조간(萬事無心一釣竿, 낚싯대 드리우고 세상의 모든 일에 마음을 비웠으니), 삼공불환차강산(三公不換此江山, 삼공의 자리도 이와 바꾸지 않을 것이로다).”라는 송(宋)나라 시인 대복고(戴復古)의 조대(釣臺)란 시가 걸려있는데, 당시 성산군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팔문각

곡강 마을 뒷산 정상에는 이궁대(離宮臺)가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 지증왕 때 금관가야를 징벌하기 위해 장군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진(陣)을 쳤던 곳으로, 임금의 순행 시에는 행재소(行在所, 왕이 임시로 머무는 별궁)로 사용되었으며, 서기 532년(신라 법흥왕 19)에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이 그의 비(妃)와 세 아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와서 항복한 장소로 전해지고 있다.

정자 앞쪽에 있는 팔문각(八門閣)에 올라 넓은 품으로 안고 도는 낙동강의 유유함에 잠시 젖어 내 안의 강과 대화를 가져본다. 짧은 시간에도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며 세속에서 잠시 벗어난 듯 심신이 한결 가벼워진다. 살아가면서 마음이 답답하거나 현실의 삶에 지쳐질 때면 또다시 이곳을 찾아오리라.

K-헤리티지 뉴스 논설위원 장창표

ICPS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