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멋과 기품이 깃든 별서(別墅)

서고정사(西皐精舍)를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3.10.23 07:45 의견 0

계절은 어느덧 가을의 절정을 향해 치달리며 주변 산하(山河)를 형형색색의 고운 빛깔로 물들이고, 성급한 가로수들은 하나둘 낙엽을 떨구며 먼 길을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즈음이다. 따뜻한 주말 오후에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퇴로1길 43)에 있는 서고정사(西皐精舍,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77호)를 찾았다.

서고정사는 항재 이익구(李翊九, 1838~1912, 월연 이태의 14세손)가 1890년(고종 27)에 두 동생 능구(能九), 명구(命九)와 함께 단장면 무릉에서 퇴로로 입거(入居)하여 1898년에 지은 별서(別墅, 본가와 떨어진 인접한 전원에 은둔하기 위해 지은 집) 정원이다. 이후 둘째 능구는 서고정사 아래쪽에 용현정사(龍峴精舍), 셋째 명구는 퇴로의 동쪽 고즈넉한 곳에 삼은정(三隱亭)을 지었다. 서고정사는 화악산 산기슭의 퇴로 ‘서쪽에 있는 작은 언덕’이라 뜻으로, 퇴로리 여주이씨고가(驪州李氏古家)에서 3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서고정사

이곳의 외부공간은 크게 네 영역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정당(正堂)인 항재(恒齋)와 부속건물인 한서암(寒棲菴)으로 이루어진 정사(精舍) 중심의 주 공간, 둘째는 인공 연못인 활수당(活水塘)과 내원(內苑)인 수(樹, 나무) 공간, 셋째는 관리인이 거주하는 관리사와 부속건물인 관리사 공간, 넷째는 담장 밖의 외부 영역인 경외(境外) 공간이다. 내부 공간은 전형적인 조선 선비의 삶을 담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별채인 한서암 및 그 앞쪽에 조성한 'ㄴ'자 모양의 연못인 활수당과 그 연못 가운데 조성한 조그만 둥근 섬, 관리사와 문사(門舍), 그리고 동편의 항재(恒齋)와 서편의 역락당(亦樂堂)이라는 방을 두었다. 어른과 아이들의 거처를 달리하기 위해 방에는 두 개의 협실(夾室)을 두었는데, 북쪽으로 복벽(複壁)을 두어 책을 보관하고, 서남쪽으로 쪽문을 내어 한서암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한서암의 남쪽을 튀어서 연못인 활수당을 접하게 하였으며, 그 서북쪽으로 창문을 내어 서늘한 기운이 들어 오도록 하고, 창문 밖으로는 툇마루를 내었으며, 연못 주변에는 비자나무, 주목, 섬잣나무, 백송, 삼나무, 편백 등 당시로는 구하기 힘든 조경수를 심었다. 지금도 이곳의 독특한 정원 구성은 연구자들의 높은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활수당과 한서암

항재(恒齋)는 이곳에서 정자와 주변 경관을 즐기며, 후학을 위해 실사구시(實事求是)에 바탕을 둔 경사(經史) 연구와 개혁경제(改革經濟)를 가르치다가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가 망하자 두문불출하고 저술로 망국의 한(恨)을 달래며 여생을 보냈다. 중국의 전국시대로부터 당말오대(唐末五代, 중국의 당~송나라 때까지의 열 나라와 그 시대)에 이르기까지 1,300년간의 역사를 분석하고 평한 사평집(史評集)과 독사차기(讀史箚記) 등을 저술하였으며, 문집으로 항재집(恒齋集)을 남겼다. 정당(正堂)에는 아들 성헌 이병희(李炳憙)가 쓴 서고정사기(西皐精舍記)가 걸려 있다.

성헌(省軒)은 “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겨레와 문물(文物)은 망할 수 없다”라고 주창하며, 국고문헌(國故文獻)의 정리와 후진 양성을 사명으로 여겼으며, 조선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인 조선사강목(朝鮮史綱目)을 집필하고는 성헌집(省軒集)을 남겼다. 특히, 이곳은 1917년 성호 이익(李翼, 1681~1763)의 문집 ‘성호집(星湖集)’을 국내 최초로 출판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이병희가 설립한 정진학교는 1890년(고종 27) 부친이 세운 화산의숙(華山義塾)의 유지를 계승하였는데 1910년 폐교 후 야학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3·1운동 이후에는 신지식을 가르치는 학교로 변모(變貌)했다. 부지와 재원 확보를 위해 여주이씨 일문의 재원으로 퇴로리 앞 부지에 건물을 지어, 1921년 3월 25일 사립정진의숙(私立正進義塾)으로 개교했다. 화산의숙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윤리와 애국정신 및 신지식의 함양에 교육의 중점을 두고 한글, 역사와 지리, 애국 가창 등을 통해 애국애족 의식을 고취(鼓吹)시켰다. 이러한 교육 내용이 문제가 되어 1921년 9월 교원 전원이 경찰에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1922년 2월에 정진학교(正進學校), 해방 후에는 정진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98년에 폐교되고 현재는 임실치즈스쿨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항재(恒齋)의 증손자이자 성헌(省軒)의 손자로 성균관대 교수와 연세대 석좌 교수를 지내고 민족문화추진회 회장과 이사장 등을 역임한 벽사 이우성(李佑成, 1925~2017)은 퇴로리 여주이씨들의 행적과 문집, 집과 유물 등의 내용을 모아 ‘퇴로리지(退老里誌)’를 발간했다. 여기에는 항재의 퇴로복거기(退老卜居記)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곳으로 들어오게 된 사정도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곳을 대표하는 항재, 성헌, 벽사 등 퇴로리 여주이씨 문사(文士)들은 구한말 기울어져 가는 국운(國運)을 지켜만 보지 않고 사재(私財)를 모아서 교육과 학문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鼓吹)시키고, 국민을 계몽하는 등 지도층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려고 애쓴 실천적 선비들이었다. 1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한적한 별서(別墅)에는 아직도 그 시절 선비의 멋과 기품(氣品)이 정사(精舍) 곳곳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K-헤리티지 뉴스 논설위원 장창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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