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우식 칼럼] 민비 (명성황후) 사진 진위 논란과 검토 (5)

가장 친숙한 사진 (C), 원본사진의 추적, 130년의 시간여행

편집국 승인 2023.11.13 10:50 | 최종 수정 2023.11.14 05:54 의견 0

명성황후로 추정되었던 사진 C (1906년에 미국의 Homer B. Hulbert가 출판한 The Passing of Korea (대한제국 멸망사)에 A Palace-Woman in Full Regalia (정장한 궁중 여인)으로 소개된 사진)

가장 친숙한 사진 (C)

떠구지 머리와 쌍 비녀를 한 사진으로 원로 사학자들에 의하여 명성황후의 모습으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친숙한 사진이다. 1977년부터 국사 교과서에도 실렸으나 비교적 근래에 부정론이 일어나면서 국사 교과서에서도 실리지 않게 되었다. 의상, 머리 모양, 버선발이 보이는 모습 등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논리를 다져가기 위한 근거자료를 수집하고 제시하려 하고 명성황후의 사진이 맞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황상의 증거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1906년 이전에 같은 사진이 어떻게 소개되었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추적해 보자. 이 사진이 언제 최초로 소개되었으며 어떤 설명이 있었는지를 조사하면 의문이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1906년 미국

사진의 설명에 궁중 여인이라는 표현과 민비 또는 왕비라는 서로 다른 표현이 나오면 혼란이 가중된다. 서로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기 때문이다. 다수결로 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니 전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같은 사진이 오랜 기간 동서양에서 출판물로 소개되면서 사진을 본 사람이라면 출판물에 설명된 대로 최면이 걸린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 번 생각하고 기억으로 저장된 것을 바꾸는 일은 더욱 어렵다. 같은 사진이라도 크기나 색상이 다르면 느낌이 달라진다. 사진 일부를 가리고 보더라도 인상은 크게 달라진다. 심리적인 암시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멋진 책의 형태로 인쇄된 출판물의 경우에는 저자, 출판기관, 출판물이 갖는 보이지 않는 힘도 우리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게 된다. 앞의 사진과 비교하면서 느낌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앞 사진이 소개된 1906년에 미국의 Homer B. Hulbert가 출판한 The Passing of Korea (대한제국 멸망사)의 표지와 A Palace-Woman in Full Regalia (정장한 궁중 여인)로 소개된 페이지 (p. 139)

1904년 프랑스

‘세계 각국’이라는 의미의 프랑스 잡지 르 뚜르 뒤 몽(Le Tour du monde)은 1904년에 제10호로 대한제국 특집호를 편성하면서 대한제국을 소개하는 많은 사진이 소개되었다. 문제의 사진이 L’impératrice de Corée assassinée par une faction japonaise pendant la nuit du 7 octobre 1896. (1896년 10월 7일 밤, 일제에 의해 암살된 대한제국 황후)라는 설명이 붙여져 소개되었다. 실제로는 1895년 10월 8일 밤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사건 발생 연도가 1년 늦게 적혀있다.

프랑스의 잡지 르 뚜르 뒤 몽(Le Tour du monde) 제10호에 L’impératrice de Corée assassinée par une faction japonaise pendant la nuit du 7 octobre 1896. (1896년 10월 7일 밤, 일제에 의해 암살된 대한제국 황후.)

같은 잡지는 1892년에도 공교육부 민족지학 임무를 담당했던 탐험가 Charles Varat 씨가 1888년부터 1889년까지 대한제국을 여행한 미발표 사진과 글을 출판했다. 여기에는 대원군의 사진과 고종과 순종이 함께 찍은 사진도 소개되어 있다. 명성황후의 사진은 실리지 않았다. 아마도 사진이 촬영되기 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책자가 출판되었다.

LE TOUR DU MONDE (1892) - Voyage en Coree par M. Charles Varat, Explorateur charge de Missions Ethnographiques par le Ministere de L'instruction Publique (1888-1889 Texte Et Dessins Inedits) Par M. Charles Varat, Published by Librarie Hachette et Cie, France, 1892

1904년 이탈리아

이탈리아 왕국의 외교관이자 해군 제독이었던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 1876년 – 1948년) 는 1904년에 꼬레아 꼬레아니(Corea e coreani, 조선과 조선인)라는 책 1권과 2권을 출판하며 당시의 대한제국에 관한 많은 정보를 소개했다. 제1권의 99쪽에 문제의 사진이 소개된다. UNA DAMA DI PALAZZO IN ABITO DI CORTE (궁중 드레스를 입은 궁녀 또는 정장 차림의 궁중 여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인물 사진은 같지만, 사진의 배경이 복잡하다. 다른 배경 사진 위에 인물사진을 합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책의 115쪽에는 배경으로 사용된 사진이 LA GUARDAROBA DI UNA GHI-SANG (기생의 옷장)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가 1904년에 저술한 꼬레아 꼬레아니(Corea e coreani, 조선과 조선인)라는 책 1권의 표지와 99쪽에 소개된 문제의 사진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가 1904년에 저술한 꼬레아 꼬레아니(Corea e coreani, 조선과 조선인)라는 책 1권의 99쪽에 소개된 문제의 사진으로 UNA DAMA DI PALAZZO IN ABITO DI CORTE (궁중 드레스를 입은 궁녀 또는 정장 차림의 궁중 여인)으로 소개되어 있다.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가 1904년에 저술한 꼬레아 꼬레아니(Corea e coreani, 조선과 조선인)라는 책 1권의 115쪽에 소개된 문제 사진의 배경으로 사용된 LA GUARDAROBA DI UNA GHI-SANG (기생의 옷장)으로 소개된 사진

1895년, 1898년, 1904년 프랑스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 땅(Le Temps, 1829년 – 1940년)의 청일전쟁 종군특파원으로 1895년 3월 조선에 파견된 빌따르 드 라게리 (Villetard de Laguerie, 1858년 - 1913년)는 을미사변 당시 1년간 국내에 체류하면서 조선 관련 기사를 송고했다. 을미사변에 관해서는 1895년 11월 2일자 L’ILLUSTRATION에 기사를 실었다. 기사 제목은 LE DRAME CORÉEN(조선 드라마), 명성황후의 사진 아래에는 La reine de Corée (조선의 왕비)로 적혀있다.

1898년에는 La Corée, indépendante, russe ou japonaise (조선, 독립, 러시아 또는 일본), 1904년에는 La Corée et la guerre russo-japonaise (조선과 러일전쟁)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빌따르 드 라게리는 문제의 사진을 바탕으로 한 1895년부터 싣기 시작한 그림에 모두 La reine de Corée (조선의 왕비)로 적고 있다. 적어도 1895년 3월부터 조선에서 취재하면서 그 사진의 주인공이 명성황후(당시는 민비)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일전쟁 종군특파원으로 1895년 3월 조선에 파견된 빌따르 드 라게리(Villetard de Laguerie)가 L’iLLUSTRATION에 실린 을미사변에 관한 1895년 11월 2일자 기사 (제목은 LE DRAME CORÉEN(조선 드라마), 명성황후의 사진 아래에는 La reine de Corée(조선의 왕비)로 적혀있다.

청일전쟁 종군특파원으로 1895년 3월 조선에 파견된 빌따르 드 라게리(Villetard de Laguerie)가 1898년에 출판한 La Corée, indépendante, russe ou japonaise (조선, 독립, 러시아 또는 일본)에 실린 고종과 순종의 사진과 대원군, 명성황후, 고종의 사진

1895년 일본

1895년 2월에 일본에서는 춘양당(春陽堂)이라고 하는 출판사에서 전국사진화보(戦國寫真画報) (9)집을 발간하며 남녀 한 사람씩 사진을 실었는데 남자 사진에는 조선관리제복(AN OFFICIAL IN CEREMONIAL LOBE), 여자 사진에는 조선 궁녀(COREAN COURT MAID)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같은 사진임에도 왕비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

1895년 2월에 일본 춘양당(春陽堂) 출판사에서 발간된 전국사진화보(戦國寫真画報) (9)집에 실린 남녀 한 사람씩 사진. 남자 사진은 조선관리제복(AN OFFICIAL IN CEREMONIAL LOBE)으로 여자 사진은 조선 궁녀(COREAN COURT MAID)로 설명되어 있다.

1894년 11월 미국

미국과 조선은 1882년에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로 수교했다. 1883년에 주한 공사 루시어스 푸트(Lucius Harwood Foote, 1826년 - 1913년)가 조선에 부임하였다.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 막강해진 청나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1883년 정사(正使)에 민영익(閔泳翊), 부사(副使)에 홍영식(洪英植), 서기관으로 서광범(徐光範), 수행원으로는 변수(邊樹, 邊燧)·유길준(俞吉濬) 등 개화파 인사들을 대동시킨 친선 사절단으로 보빙사(報聘使)를 서방 세계에 파견하였다. 1883년에 조선에서 최초로 미국 등 서방 세계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이다.

당시의 이러한 시대 상황과 맞물려 미국 내에서도 조선에 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에 맞춰 DEMORIST’S FAMILY MAGAZINE이라는 미국 잡지에서는 1894년 11월호에 8쪽의 지면을 할애하면서 ‘조선의 왕비’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정치, 사회, 생활양식, 전통 등 다양한 내용을 사진, 삽화와 함께 소개했다. 여기에도 문제의 사진이 등장한다. 사진이 1894년 또는 그 이전에 촬영되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다만 사진의 설명으로는 왕비가 아닌 The Queen of Korea’s Chief Lady in Waiting (대기 중인 조선 왕비의 최고상궁)으로 되어 있다.

본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You never see a Korean lady on the street, and it would be impossible for anyone to get a photograph of the queen. I have met, however, several American ladies who have had audiences with her, and I am able to tell you just how she looks.

거리에서 조선 여성을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왕비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지만 나는 왕비와 대화를 나눴던 몇몇 미국 여성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왕비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다.

당시의 조선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왕비의 사진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화가가 그린 조선 귀부인의 그림을 본문에 소개하고 있다. 조선 왕비의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미국 잡지 DEMORIST’S FAMILY MAGAZINE 1894년 11월호의 표지와 목차. 눈에 익은 문제의 사진이 보인다. The Queen of Korea’s Chief Lady in Waiting (대기 중인 조선 왕비의 최고상궁)이라는 설명이 븥어있다.

미국 잡지 DEMORIST’S FAMILY MAGAZINE 1894년 11월호의 ‘조선의 왕비’라는 제목의 기사 표지

미국 잡지 DEMORIST’S FAMILY MAGAZINE 1894년 11월호의 ‘조선의 왕비’기사 본문에 실린 문제의 사진. The Queen of Korea’s Chief Lady in Waiting (대기 중인 조선 왕비의 최고상궁)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미국 잡지 DEMORIST’S FAMILY MAGAZINE 1894년 11월호의 ‘조선의 왕비’기사 본문에 실린 조선화가가 그린 한국의 귀부인(A NOBLE KOREAN DAME BY a KOREAN artist)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1894년 9월 일본

2006년에 캐나다에 거주하는 중국인으로부터 입수한 ‘조선국귀현초상(朝鮮國貴顯肖像)’이라는 화보에는 왼쪽부터 왕비 민씨(王妃閔氏), 가운데 조선국왕(朝鮮國王), 오른쪽에 대원군(大院君)이라 적혀진 그림이 배열되어 있었다. 초상화 아래에는 연대, 주소, 출판사, 발행일자, 편집자명 등이 인쇄되어 있다. 초상화 아래 오른쪽에는 ‘판권소유(板權所有) 메이지(明治)27년(1894년) 9월10일 인쇄, 동년 동월10일 발행’이라고 쓰여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해(1895년)보다 1년에 앞서 그려진 셈이다. 미국 잡지 DEMORIST’S FAMILY MAGAZINE 1894년 11월호의 ‘조선의 왕비’라는 기사가 나오기 두 달 전에 인쇄되었고 한 달 전에 발행된 셈이다. 왕비 민씨(王妃閔氏) 초상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초상화는 석판화로 그려졌는데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인기를 끌던 미술 기법이다. 초상화를 그린 작가는 동경 신양당(信陽堂)의 발행인이자 당대 최고의 석판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오까무라 마사꼬(岡村政子, 1858년 – 1936년)로 메이지 24년(明治24年, 1891년)에는 메이지 천황과 황후의 초상을 인쇄하여 헌납하고 배포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천황과 황후의 초상화의 판매와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가 창간한 시사신보(時事新報)의 석판화 인쇄를 통하여 큰 성공을 거뒀다. 고종과 대원군의 사진은 여러 출판물에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민비 사진의 경우에는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아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초상화의 밑그림이 된 민비의 사진은 여러 출판물에 소개된 것과 동일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그림의 제목이 말하듯 ‘조선국귀현초상(朝鮮國貴顯肖像)’으로 다른 나라의 권력자 세 사람의 초상을 그리면서 사실 확인은 거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의 빌따르 드 라게리(Villetard de Laguerie)가 사용한 민비, 고종, 대원군의 초상화는 모두 이 초상화의 배치와 크기를 조정하여 실은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도 가장 앞선 시기에 그려진 초상화이므로 ‘조선국귀현초상(朝鮮國貴顯肖像)’을 원본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1894년 9월 10일에 일본 동경 신양당(信陽堂)에서 인쇄하고 10월 10일에 발행한 ‘조선국귀현초상(朝鮮國貴顯肖像)’ (55cm x 40.4cm) 왼쪽부터 왕비 민씨(王妃閔氏), 가운데 조선국왕(朝鮮國王), 오른쪽에 대원군(大院君)이라 적혀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판매한 엽서

1897년에 대한제국에 입국하여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진엽서를 만든 프랑스인 샤를 알레베크(Charles Alévêque, 1865년 – 1925년)도 문제의 사진을 엽서로 제작했다. 파리 만국박람회 대한제국 정부 대리인으로도 활동했다. 안례백(晏禮百)이라는 우리식 이름도 가지고 있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자신이 만든 사진엽서를 전시하고 판매하였다. 문제의 사진은 1894년에 이미 사용된 적이 있는 것이므로 자신이 촬영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설명문을 적었겠지만 사진 아래에 프랑스어로 Dame du Palais. Costume de ceremonie로 적었다. 정장 차림의 궁중 여인이라는 뜻으로 궁녀로 해석할 수 있다. 1901년에 최초로 프랑스어 – 한국어 사전을 만들기도 했다.

인쇄물이라고 하더라도 무작정 적힌 것이 사실일 것이라고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한 것도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는 많다. 하물며 130년 전의 일이고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한 정보들을 취합하여 조각 퍼즐을 맞추듯 하나씩 정리해 가면서 그림을 완성시켜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1897년에 대한제국에 입국하여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진엽서를 만들었고 최초로 프랑스어 – 한국어 사전을 만든 프랑스인 샤를 알레베크(Charles Alévêque, 1865년 – 1925년)

문제의 사진을 사용해서 제작한 사진엽서로 정장 차림의 궁중 여인이라는 뜻으로, 궁녀로 해석되는 Dame du Palais. Costume de ceremonie로 적혀있다.

1909년 소인이 찍힌 사진엽서

문제의 사진이 엽서로 제작되어 유통된 경우도 확인된다. 우표에 42年(明治42年, 1909年)7월 31일자 마산(馬山)이라고 적힌 소인이 찍혀있다. 아래에는 한국 궁중의 나이든 여인 (韓国宮中の老女、An Old Woman in the Corean Court)라고 적혀있다. 1910년에 한일 합방되기 1년 전에 경상남도 마산 우체국을 통해서 우송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왕비의 얼굴을 본 사람이 조선에 몇 명이나 있었을까? 지금처럼 도로나 교통이 발달하여 지역 간에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던 시절도 아니었고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 스마트폰이 있던 시대도 아니었다. 미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낮에는 여자들은 밖에 다니지도 못했으며 왕비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왕비의 얼굴을 알 수 있을까? 지금처럼 SNS에 자랑삼아 사진을 올리는 취미를 가진 왕비가 있었을 리도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130년 전에는 이런 일은 관심거리도 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현재까지 조사한 내용을 잘 정리하고 추적해 간다면 역사적 실체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얼마 전에 남원시에서 새롭게 제작한 성춘향 표준영정에 관한 사회적 논란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상상으로 표준영정도 제작하는 마당에 합리적인 결과가 나온다면 역사적 사실로 확정 짓지 못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은 내용을 공유하고 싶지만 내용이 너무 길어지게 되어 앞으로의 칼럼에서 정보를 추가하고 보완하는 방향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다른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엽서로 한일통신합동기(1905년 - 1910년)인 1909년에 마산에서 발송되었으며 An Old Woman in the Corean Court, 韓國宮中の老女(한국 궁중의 나이든 여인)라고 쓰여있다.

<유우식 문화유산회복재단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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