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혼(魂)과 뿌리가 깃든 곳

천진궁(天眞宮)을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4.01.03 20:44 | 최종 수정 2024.01.27 15:58 의견 1

대망의 2024년 갑진년(甲辰年) 새해가 밝았다. 이즈음엔 누구나 새로운 날들에 대한 기대, 희망, 목표, 결심이라는 단어들을 한 번쯤은 생각해 본다.

밀양에서 태어나 밀양아리랑을 부르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영남루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남루 누각에 오르고도 가까이에 있는 천진궁을 몰랐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인 영남루(국보) 마당 서북쪽에 있는 천진궁(天眞宮,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은 1652년(효종 3) 밀양 부사 김응조가 창건하여 전패(殿牌, 왕의 초상 대신 ‘殿’ 자를 새긴 객사의 목패)를 모시던 공진관(拱辰館, 전패를 봉안한 객사)을 1722년(경종 2)이 단청을 올려 대덕전(大德殿)이라는 현판을 걸고는 우리나라 개국시조(開國始祖)인 단군의 영정과 위판(位版, 나무로 만든 지방)으로 고조선 88 왕을 모신 다음, 좌측(동쪽) 벽에 부여 77 왕, 고구려 27 왕, 가락국(가야) 10 왕, 고려 32 왕의 시조 왕위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우측(서쪽) 벽에는 신라 55 왕, 백제 30 왕, 발해 14 왕, 조선 27 왕의 시조 왕위를 봉안한 궁(宮)이다.

영조 때에는 불에 타기도 해 다시 지어졌는데,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일본 헌병대가 이곳을 강점하여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을 말살하기 위해 우리 백성을 가두는 옥사(獄舍)로 사용했다. 더구나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에는 전패(殿牌)가 땅에 묻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천진궁

‘우리가 물이라면 새 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 아바님(할아버지의 옛말)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개천절(10월 3일) 노래의 첫 부분이다. 올해가 고조선 개국 4357년이다. 1952년 고장의 뜻있는 인사 500여 명이 우리 민족의 뿌리와 주체 의식을 높이기 위해 단군봉안회를 결성했다. 1953년 처음 봉행한 개천대제에는 전국에서 3,000여 명의 인사들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뤘다. 특히, 이날에는 이시영 부통령과 신익희 국회의장이 참석하여 큰 관심을 모았다. 그날 기념으로 심은 2그루 느티나무가 아름드리나무로 자라 현재 천진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곳의 제례는 음력 10월 3일(고조선 개국일)의 개천대제(開天大祭)와 음력 3월 15일(단군 붕어일, 崩御)의 어천대제(御天大祭)로, 전국에서 단군 영정(影幀)과 위패(位牌), 우리나라 8개국 개국시조의 위패가 모셔져 봉헌(奉獻)하는 곳은 밀양 천진궁이 유일하다.

1957년 대대적인 수리와 함께 대덕전을 천진궁으로 바꾸고, 출입문(일주삼문)에는 만덕문(萬德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만덕문은 대종교 경전의 하나인 「삼일신고(三一神誥) 천훈(天訓)」의 ‘계만선문만덕((階万善門万德)’에서 인용됐는데, 천(진)궁은 온갖 선(善)의 계단과 온갖 덕(德)의 문(門)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길(吉)하고 상서(上瑞)로운 공간으로, 이곳에 들어가려면 많은 덕과 선을 베풀어야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만덕문

1958년 중앙차원의 사단법인 ‘단군숭녕회’가 설립되면서 밀양의 단군봉안회도 1961년 ‘단군숭녕회’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진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식 팔작지붕의 조선 후기 건물로 1974년 12월 28일 경남지방유형문화재(제117호)로 등록되었다.

천진궁이 생긴 이후로 많은 밀양 사람들은 정월 초나 집안의 길흉사가 있을 때 이곳을 찾아 고(告)하곤 했었다. 특히, 해외나 멀리 객지로 떠날 때는 천진궁을 찾아 엄숙한 마음으로 예(禮)를 올리며 어디에 가 있던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며 민족과 인류, 그리고 고장과 가문의 발전을 위한 큰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천진궁(天眞宮)에 걸려 있는 주련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지존좌우백령호립(至尊左右百靈扈立, 거룩하신 한얼님 두 옆 모든 신령 모시었나니), 유희오락단우입습(遊戱娛樂檀雨雴霫, 같이 노닐고 즐기심이여 배달의 이슬비 내리시도다). 즉삼즉일반망귀진(卽三卽一返妄歸眞, 삼일의 진리 닦아 나가면, 가닥을 돌이켜 참에 이르리). 항조항락군상동춘(恒照恒樂羣象同春, 항상 밝고 항상 즐거워서, 온갖 것 모두 다 봄빛이로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정월(正月)이다. 정월이란 음력으로 일 년 중의 첫째 달을 일컫는데, 적어도 한 해의 시작만큼은 마음을 바르고 굳건히 해보자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19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의 작가 버나드 쇼(G. Bernard Shaw)의 묘지명에는 이렇게 적혀있다.“내 인생,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올 정월에는 우리 민족의 혼(魂)이 숨 쉬고 반만년 뿌리가 깃든 천진궁의 숨결을 찾아 자신의 삶을 되새겨 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 아닐까 싶다.

K-헤리티지 뉴스 논설위원 장창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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