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효성이 만든 재사(齋舍)

모선정을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4.01.16 22:48 의견 6

예나 지금이나 효(孝)는 인간사(人間事) 가치 중에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나라에서도 큰 효자에게는 벼슬을 내리고 그 마을 앞에는 효자비(각)를 세워 많은 사람이 널리 본받도록 하였다.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에 있는 모선정(慕先亭)은 조선조 중종 때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학덕이 높았던 징사(徵士,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는 선비) 모선재 박수견(朴守堅)이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3년을 마치고도 귀가하지 않고 묘소에서 곡읍(哭泣, 소리를 내어 섧게 욺)으로 몸을 바치니. 고을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복하여 그 여묘실(廬墓室)을 모선정이라고 한데서 유래하였다.

모선정 전경

1508년(중종 3)에 모선정이 창건되어 주위의 산천과 동명(洞名)을 모선(慕先)으로 칭하면서 박수견의 효행을 기려 왔으나 임진왜란으로 건물과 문헌(文獻)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150여 년이 지난 영조 연간(1742〜1776년)에 박수견의 9세손 덕계 박증엽(朴增曄)이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로 중건한 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833년(순조 33년)에는 사림의 공론으로 고려말 두문동 72현(賢)의 한 분인 충숙공 송은 박익(朴翊, 1332~1398)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덕남사(德南祠)를 세웠다가 나중에 덕남서원(德南書院)으로 승격되어 향사를 받들어 왔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다가 1933년부터는 박익(朴翊), 박소(朴昭), 박수견(朴守堅, 박익의 현손) 세 분을 배향하고 있다. 모선정은 조선 후기의 재사(齋舍) 건물로는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2000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285호)로 지정되었다.

사당인 덕남사(德南祠)에 모시는 송은 박익(朴翊), 인당 박소(朴昭), 모선재 박수견(朴守堅) 3분 중에 박익과 박소의 행적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모선정 경내

송은 박익(朴翊)은 고려말의 충절신(忠節臣)으로 여말 팔은(八隱)의 한 분이다. 포은 정몽주(鄭夢周), 목은 이색(李穡), 야은 길재(吉再) 등의 명현(名賢)과 도의로 사귀면서 그 절의가 만세에 귀감(龜鑑)이 되었다. 1352년(공민왕 2) 이색(李穡), 박상충(朴尙衷)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한때는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전장(戰場)을 누비며 왜구, 홍건적, 여진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후 예문춘추관과 직제학을 지냈다.

정몽주가 피살되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왔는데, 그가 사는 마을 뒷산을 송악(松岳), 마을을 송계(松溪)라 부르는 것은 송도(松都, 개경)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 박익에게 태조 이성계는 공조‧ 형조‧예조‧이조 판서를 내리며 조정으로 불렀지만, ‘눈이 멀고, 귀도 먹었다’라는 핑계로 교지와 예관을 쳐다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나중에는 예관으로 양촌 권근(權近)을 보내 좌의정을 내렸지만 역시 응하지 않았다. 다섯 번을 불렀지만 한 번도 나서질 않아 ‘오징불취(五徵不就)’라고 하는데, 이처럼 그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려를 향한 충절을 굳게 지켰다.

1398년(태조 7)에 그가 서거하자 변계량(卞季良)의 건의로 조정에서 좌의정을 증직(贈職, 추증)했다. 이듬해는 ‘충숙(忠肅)’이란 시호(諡號)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서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던 일) 하였다. 그의 묘소는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화악산 자락에 있는데, 2000년 동아대 박물관 주관으로 발굴·조사작업이 이뤄져 ‘밀양박익벽화묘(사적 제459호)’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박익 묘소(밀양박익벽화묘)

현감(縣監)을 지낸 인당 박소(朴昭, 1347~1426)는 박익의 둘째 아들로 송악(삽포)에서 태어났다. 정몽주의 문하(門下)로 부친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오자 자신도 벼슬을 접고 효우로 가정의 규범으로 삼으며 생활하였다. 춘정 변계량(卞季良, 1369~1430), 춘당 변중량(卞仲良, ?∼1398)과 같은 마을에서 공부하기 위해 사포에서 모선으로 이사했다. 그들과 함께 향풍 진흥을 위한 구령동안(龜令洞案)을 만들었는데, 이후에 밀양 향약의 기초가 되었다.

안음(安陰, 안의) 현감으로 재임 시에는 휼민(恤民)·선정(善政)의 애민 실천으로 안의 광풍루 부근에 청백비(淸白碑)가 세워졌다. 선친의 묘 아래 우당(박융)‧인당(박소) 형제의 제단이 만들어져 춘추로 받들고 있으며, 모선정 경내에는 박소를 기리는 유허비(遺墟碑, 선현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가 세워져 그가 남긴 애민효제(愛民孝悌)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인당(박소) 유허비

모선정(慕先亭)을 둘러보는 내내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이들 부자(父子)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의 매화와 난초 같은 굳은 절의(節義)와 애민(愛民) 실천은 많은 관료와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기에 지금까지도 두 분의 높은 효제충신(孝悌忠臣)의 깊은 뜻을 널리 기리고 있다. 모선정은 후손들은 물론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에게 참된 효(孝)와 명분(名分) 있는 삶의 가치가 뭔지를 되새기게 하는 의미 있는 곳이다.

K-헤리티지 뉴스 논설위원 장창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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