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여주이씨(驪州李氏) 퇴로 종택

청덕당(淸德堂)을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4.01.28 20:33 의견 10

밀양시 부북면 퇴로마을은 마치 한옥을 한곳에 모아놓은 듯한 고택 집성촌이다. 화악산(華岳山, 931.5m)이 마을 전역을 병풍처럼 감싸고,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소하천이 모여 마을 앞에는 큰 저수지를 형성하여 농촌의 목가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러한 한옥마을의 중심에 있는 청덕당은 항재 이익구(李翊九, 1838~1912)가 1890년(고종 27)에 단장면 무릉에서 두 아우(능구, 명구)와 함께 이 마을에 입주한 이래 대대로 맏집 자손이 살아온 여주이씨 퇴로 가문의 자유헌(自濡軒,

이만백, 李萬白, 1656~1716)공파 종택이다. 청덕(淸德)이란 ‘깨끗한 덕성을 지니고 사는 것’을 상징하는 당호(堂號)이다.

퇴로마을 전경

‘淸德堂(청덕당)’ 편액이 걸려 있는 정침(正寢)은 정면 7칸, 측면 2간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省軒(성헌)’ 편액이 붙은 중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밖에도 동서로 각각 4칸씩인 두 익랑채(대문의 좌우에 잇대어 지은 행랑채), 대문간채, 청덕당 서편에 있는 가묘(家廟, 사당) 등으로 종택은 모두 여섯 채의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지금의 중문 밖에 큰 사랑채와 대문간채가 따로 있었으나 퇴락(頹落)이 심해 1950년대에 철거되었다

남아 있는 여섯 채의 건물 중에 정침과 가묘(家廟, 집안의 사당), 그리고 서쪽 익랑채는 1937년경에 신축하였고, 중사랑채는 전 거주자가 지은 구건물이 그대로로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가 없으나 조선 후기 영남지방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가옥구조를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현재 종택 안의 건물은 지은 시기와 건축양식이 조금씩 다른 건물이 한데 어울려 있는 셈이다.

철거된 큰 사랑채는 4칸 크기의 낡은 건물로 항재(恒齋) 이후 대대로 바깥주인이 거처하는 집이었다. 1936년(丙子)에 그 전의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중건(重建)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나, 당시 항재의 장남인 성헌 이병희(李炳憙, 1859~1938)가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선비의 제택(第宅, 살림집과 정자)이 너무 크거나 화려해서는 아니 된다는 평소의 자계(自戒, 스스로 경계하고 삼감)에 따른 것이었다.

청덕당 안채

지금 대문간채가 있는 자리 곧 중사랑 서편에는 원래 정침으로 통하는 중문이 있었는데, 4칸 크기로 방 두 개가 딸린 초가(草家) 한 채가 배치되어 있어 이채로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기와집 속에 섞여 있는 이 건물은 집안에 초상이 났을 때는 상주의 거상처(居喪處)로 사용되었고, 평소에는 약방으로 이용되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청덕당 동편에 있는 별채는 항재의 손자(성헌의 차남)인 후강 이재형(李載衡, 1891~1979)이 건립하였는데, 내당(內堂), 외당(外堂), 동서 익랑(翼廊),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외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사현합(思賢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외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쌍매당(雙梅堂)’이라는 당호를 갖고 있는데, 문사(門舍) 양쪽에 두 그루의 고매(古梅)가 있어 당호로 삼았다고 한다. 사랑채의 사랑방 위에서는 ‘후강유서(厚岡幽棲, 청덕이 그윽하고 두텁게 서려 있는 집), 담재(覃齋)’, ‘청덕고가(淸德古家)’ 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청덕당 사랑채(쌍매당)

1985년 청덕당(淸德堂)과 쌍매당(雙梅堂) 건물은 ‘퇴로리 여주이씨 고가(退老里 驪州李氏古家)’라는 이름으로 경상남도 지방문화자료(제112호)로 지정됐다. 쌍매당 북쪽 담장 밖에 있는 천연정(天然亭)과 서쪽 산기슭의 서고정사(西皐精舍)와 한서암(寒捿庵), 용현정사(龍峴精舍), 그리고 동쪽의 삼은정(三隱亭) 모두가 여주이씨 선대(先代)의 유적들이다. 특히, 서고정사는 항재가 교육과 독서, 저술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별서(別墅)로 이곳에서 그는 망국의 한(恨)을 달래며 여생을 보냈다.

한편, 항재의 증손자로 성균관대 교수와 연세대 석좌 교수를 지내고, 민족문화추진회 회장과 이사장 등을 역임한 벽사 이우성(李佑成, 1925~2017)은 퇴로리 여주이씨들의 행적과 문집, 집과 유물 등의 내용을 모아 ‘퇴로리지(退老里誌)’를 발간했다. 여기에는 항재의 퇴로복거기(退老卜居記)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곳으로 들어오게 된 사정도 설명하고 있다.

퇴로리 여주이씨 문사들(항재, 성헌, 벽사 등)은 모두가 실학사상을 이어받아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했다. 이들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이념을 바탕으로 구한말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지켜만 보지 않고 사재(私財)를 모아서 교육과 학문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鼓吹)시키고 국민을 계몽하는 등 지도층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려고 애쓴 실천적 선비의 가문이었다. 지금은 비록 집들이 퇴락(頹落)하고 있지만, 그 정신만은 아직도 집안의 곳곳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K-헤리티지 뉴스 논설위원 장창표

ICPS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