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굽어보는 제일의 누정(樓亭)

남수정(攬秀亭)을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4.03.22 21:16 | 최종 수정 2024.03.23 09:55 의견 15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내서4길 3), 낙동강을 굽어보는 풍광 좋은 곳에 남수정이 있다. 원래는 수산현(守山縣)에 속한 관사 누대(樓臺)로 1538년(중종 33)에 부사 장적(張籍)이 창건하고, 1539년 부사 어득강(魚得江)이 ‘남수정’으로 명명(命名)한 후에 부사 이상억(李象億)이 편액은 썼다. 1542년(중종 37) 부사 박세후(朴世煦)가 영남루를 중수하고 남은 재목과 기와를 이용하여 부속 건물 10여 칸을 증축하고는 당대의 명사 신재 주세붕(周世鵬)에게 기문을 받았다. 이후 남수정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유허지(遺墟地) 한쪽에 수산창(守山倉, 국창)을 건립하여 곡식을 보관하였다.

‘남수(攬秀)’라는 명칭은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여산(廬山)의 오로봉을 두고 지은 「망여산오로봉(望廬山五老峰)」이라는 시(詩) 구절 중에 ‘구강수색가람결(九江秀色可攬結, 구강의 빼어난 풍광 거둬들이니)’에서 취한 것이다. 특히, 주세붕은 기문에서 “영남루와 촉석루를 포함해서 낙동강의 본류와 지류에 있는 누(樓)‧정(亭)‧당(堂)‧대(臺) 총 17개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조망되는 풍광(風光)이 남수정에 비견될 것이 없다”라고 극찬(極讚)하였다.

현재 남수정에는 7개의 주련(柱聯)과 매산 류후조(柳厚祚)가 지은 남수정 중건기(重建記), 도담 이상억(李象億)이 지은 남수정 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과 매호 조우인(曺友仁)이 지은 등남수정(登攬秀亭) 시(詩), 그리고, 구봉 김수인(金守認)이 지은 남수정 12경을 새긴 현판(懸板)이 걸려 있다.

남수정 전경

남수정에서 바라보는 하남 들판이 오늘날처럼 비옥(肥沃)하고 광활한 농토로 바뀌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상습침수지역인 이곳은 1910년대 이후에 근대적인 토목 기술로 제방을 쌓아 그 안쪽의 습지와 황무지를 개간해서 농토로 만들고, 관개와 배수를 위한 수로를 만들어 당시로는 경상도에서 가장 소출(所出)이 높은 곡창지대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도 수산제 둑을 보수해서 농토를 개간해서 국영농장인 국농소(國農所)를 만들어 곡식을 수확하였으나 이후에는 제대로 유지되지 못한 채 버려지게 되었다. 이 들판이 조선 시대 내내 낙동강의 범람으로 늘 침수되어 그곳에는 연꽃과 마름 등이 가득한 국농호(國農湖), 국농소(國農沼)로 일컬어지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옛날, 큰비가 오면 홍수를 막고, 크게 가물면 피를 말리던 수산현(守山縣)의 큰 들은 낙동강 상류 지방에 비가 많이 내리면 가뭄에도 홍수로 농사를 망치게 되고 인명피해가 속출했다. 들판에서 농사일에 열중하다가 갑자기 범람(氾濫)하는 홍수에 막혀 목숨을 잃는 예가 빈번하던 시절, 이곳 남수정에서 사람의 목숨을 제일 귀하고 소중하게 지켜온 한 선비가 있었다.

「조선 19대 숙종(1674~1720 재임) 조의 어느 해 모내기가 한창일 때였다. 전라도의 남원 진영장(鎭營將, 지방의 병영에 두었던 진영의 책임자)을 지낸 김기(金淇, 1627~1693)라는 분이 낙향해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산에 올랐다. 들판의 농부들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날씨가 이상하여 멀리 낙동강을 바라보았다.

그 때 마침 해일(海溢)이 큰 물결을 일으키며 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해일이 삽시간에 들판의 농부들을 덮칠 게 분명하였기에 급히 내려와 관원(官員)들에게 빨리 농부들을 피신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관원들이 들판에 닿기도 전에 해일이 닥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는 몇몇 관원들을 데리고 곡식이 가득 쌓인 국창(國倉)으로 달려가 속히 불을 지르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관원들은 곡식 창고에 불을 지르라는 그 명(命)을 이해할 수가 없어 머뭇거리자 그는 손수 국창에다 불을 질렀다. 화창한 초여름 날씨라 국창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활활 타올랐다. 이때 들판에서 모를 심던 농부들이 국창에 난 불을 보고는 "국창에 불났다!" 외치면서 일제히 달려왔다.

농부들이 열심히 불을 끄고 있을 무렵에 낙동강을 거슬려 올라오던 집채 같은 물결은 어느새 들판을 모두 덮쳤다. 온 들판은 삽시간에 물바다로 변했다. 불을 끄러 온 농부들은 전부 살았지만, 들판에서 그냥 일만 하던 농민들은 해일에 휩쓸러 죽고 말았다. 불을 꺼려 온 농민들은 김기(金淇)의 지혜로 살아났음을 알고는 엎드려 감사의 절을 올렸다. 이런 사실을 임금에게 상소(上疏)하자, 곡식을 태워 버린 것은 안타깝지만, 농민들의 귀중한 생명을 살려낸 그의 공(功)을 치하하며 국창 일대의 땅을 하사(下賜)하였다.」

남수정에서 바라보는 강변 풍경

만년에 그는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내려준 땅)에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남수정을 중건하고 강학(講學)을 하면서 지냈다. 이후에 건물이 화재로 소실(燒失)되자 1865년(고종 2)에 후손인 현감 김난규(金蘭奎)가 중창하였다가 100여 년 동안에 다시 퇴폐(頹廢)해진 것을 1977년에 문중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확장·중건하여 광주 김씨 대종중의 재실(齋室)이 되었다. 최근에 다시 건물을 중창하고는 경내에다 추모정(追慕亭)을 지었다.

지금은 남수정에서 바라보는 강물도 옛 모습이 아니고, 주변의 풍경도 많이 변하여 그 옛날 주세붕이 찬탄(贊嘆)했던 낙동강 산수의 빼어난 풍광은 단지 머릿속으로 상상할 따름이다. 간혹 이곳 주변의 땅을 파보면 지금도 그 옛날 국창(國倉)에 불을 질렀던 미탄(米炭)의 흔적을 간혹 찾을 수도 있다.

K-헤리티지 뉴스 논설위원 장창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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