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흘리 고개의 효자(孝子) 정려각

어영하 효자비를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4.05.17 06:52 의견 8

인간 존엄의 절대적 가치로 충·효·열(忠·孝·烈)을 숭배하고 요구되던 시대에 뛰어난 충신·효자·열녀가 출현한 가문에는 나라에서 내려주는 정려각(旌閭閣)을 세우고 모범 된 행적을 비(碑)에 새겨서 가문의 영예와 자랑으로 삼았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었다지만 효(孝)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가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조상(祖上) 없는 자손 없듯이 부모 없는 자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밀양 시청에서 경상남도지방도 1080호인 창녕·무안 방향으로 5km쯤 가면 부북면과 무안면의 경계인 마흘리 고개에 이른다. 이 고개를 조금 지나면 왼편으로 백안마을 입구의 버스 승강장(乘降場)이 나오고, 여기서 10여m 떨어진 맞은편 길옆에 오랜 풍상(風霜)으로 빛이 바랜 작은 비각이 보인다. 바로 효자 성균진사 어영하 정려각(孝子 成均進士 魚泳河 旌閭閣)이다.

효자 성균진사 어영하 정려각

이 정려각은 성균 진사 어영하의 효행(孝行)을 기리는 정문(旌門,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고자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으로, 처음 정려(旌閭)를 꾸민 것이 어느 해인지 상세히는 알려지지 않지만, 조선조 16대 임금인 인조(仁祖, 1623~1649) 때 세워진 것으로 1800년(정조 24)부터 1905년(고종 12) 사이에 네 번을 중건하고 세 번 옮겼다고 한다.

비각의 주인공 어영하(魚泳河)는 본관이 함종(咸從)으로 생원 어섭문(魚燮文)의 증손이자 어한위(魚漢緯)의 아들로 성균진사(成均進士)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살아서 섬길 때나 죽어서 제사 지낼 때나 다름없이 정성을 다하여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앙(推仰)을 받았다. 이러한 그의 행실(行實)이 널리 알려져 조정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오고, 그가 살던 마을의 이름도 어은동(魚隱洞)으로 부르게 되었다.

류(柳)씨 집안에 장가를 들어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다녔는데, 응벽(應壁), 응규(應奎), 응익(應翼), 세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더 상세한 행적(行績)은 알 길이 없다.

1925년(을축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학부편집국장(學部編輯局長)을 지낸 방계 후손 어윤적(魚允迪)이 지은 ‘효자 성균진사 어영하 정려기(孝子 成均進士 魚泳河 旌閭記)’에 의하면 “공은 부모를 섬김에 받들어 순종하고 기쁘게 하여 그 마음을 위로하였고, 음식은 따뜻하고 서늘하게 조리하여 입과 몸을 편하게 하였다. 양친(兩親)이 돌아가시자 물도 입에 넣지 않고 피를 토하여 거의 죽을 듯하였으며, 여묘(廬墓) 살이 하면서 뼈만 남도록 여위었으나 밤낮으로 상복(喪服)을 벗지 아니하고, 산 입구를 나가지 않고 3년을 하루같이 지냈다. 복(復)을 마치고는 그 정성을 사당(祠堂)으로 옮겨 아침저녁 뵈옵는 예를 반드시 펴고, 기일(忌日)이 되면 곡식 한 톨 삼키지 않으며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안색에 흘러넘쳤다. 그러므로 집을 표창하는 은전(恩典)이 있었다. 1905년(을사년) 중건 때 정려(旌閭)가 있던 동네에서 관(官)에 올린 글을 살펴보니, 인조(仁祖) 때 정려를 내린다는 명(命)이 있었지만, 자손이 전해지지 않아 사림에서 여러 번 수리하면서 기와를 돌로 대신하였다고 하는데, 당시의 본 고을의 수령 조종서(趙鐘緖)가 1천 문의 돈을 내고, 면의 호구에 20문을 배당하여 네 성씨가 전력으로 준공하였고, 이때 유사(有司)는 이지윤(李智潤), 석치환(石致煥), 석세경(石世京)이었다. 온 동네가 부역하였는데, 석(石) 씨 일문에서 추모하는 마음은 진실로 석세용(石世瑢)의 기풍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 사실을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대비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안마을 전경


자손들의 왕래가 단절된 근래에는 인근의 이(李), 류(柳), 박(朴), 석(石) 씨(氏) 등 네 문중에서 보수와 재건(再建)을 전담해 왔으며, 현재의 장소로 이건(移建)할 때는 방계 후손인 어재원(魚在源)이 멀리서 와서 주관하였다.

지금의 여각(閭閣)은 1960년에 박한섭(朴漢燮)의 발의로 최재문(崔在文)이 출자(出資)를 하고. 설병도(薛炳道)가 일을 맡아 관비로 단청을 하였다. 한편, 백안마을 충주석씨 문중의 석일정(石日楨)은 정려수호(旌閭守護)를 위한 위토답(位土畓, 제사와 관리 비용을 위한 전답) 한 마지기(200 坪)를 출연하였다.

예로부터 ‘효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라 하여 가정, 사회, 국가에서 효를 장려하며 매우 고귀한 가치로 여겼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부모를 섬기는 효(孝)의 가치는 변할 수가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대가족이 해체되고 호주제가 폐지되는 등 가족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가치관(價値觀)이 변하면서 효에 대한 인식도 많이 퇴색(退色)되었다.

비록 많은 사람이 못 본 채 지나치는 작은 효자각 일지라도, 만연(蔓延)된 개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가 인간성을 짓밟고, 우리의 고유의 아름다운 풍속인 효우(孝友)마저 무너뜨리는 암담한 이 현실에서, 오늘도 빛바랜 저 효자비(孝子碑)가 말없이 꾸짖는 교훈(敎訓)을 가슴 깊이 새겨 본다.

K-헤리티지 뉴스 논설위원 장창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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