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6일 기아국가유산지킴이와 벽진서원은 회재 박광옥선생의 발자취 탐방에 나셨다. 기아국가유산지킴이와 벽진서원은 6년 전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서로의 관계를 적립하고 국가유산지킴이의 역할을 다짐했다. 만남 초기에는 벽진서원 주변의 정화 활동에 그쳤던 기아국가유산지킴이의 활동이 6년이 지난 지금은 벽진서원과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모색하며 2023년에는 광주 서구자원봉사센터에서 시행하는 공모사업에서 “청소년과 함께하는 문화유산지킴이 활동”을 벽진서원에서 진행해 청소년들의 대단한 관심과 지역민으로부터 서원에 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를 형성했다.
또 하나는 벽진서원에서 매년 실시하고 있는 유교아카데미는 인문학 강좌를 매년 개최해 기아국가유산지킴이의 인문학적 역량을 키우는데 큰 디딤돌이 되었다. 이처럼 서원으로써의 역할을 다함으로 인문학 진흥과 선비정신을 함양해 자유와 정의의 문화국가에 맞는 가치관을 세우고, 유교 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미래의 가치를 습득하는 장을 제공해 문화적 교양인을 양성하고 지역주민들의 문화 향유, 문화유산 활용, 인문학 강좌를 통해 전통과 미래의 가치를 확산하고 문화적 교양을 쌓으며 지역주민과 광주시민 누구나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원과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기아국가유산지킴이와 벽진서원은 이와 같은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이번 회재 박광옥선생의 발자취 탐방을 통해 더욱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며 모처럼 기아국가유산지킴이 가족을 동반한 야외탐방을 통해 회재 선생의 업적을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음성박씨 정승공파 박희진 종친회장은 기아국가유산지킴이와 가족이 만난 자리에서 감사와 고마움을 어떻게 표할까 고민하다 이제야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며, 야외탐방활동에 안전이 최우선이라며 즐거운 탐방이 되시라고 했다.
벽진서원은 『1602년(선조 35)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임진왜란의 공신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의 덕행과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 1681년(숙종 7)에 김덕령(金德齡)을 추가 배향하는 동시에 중수하였으며, ‘의열사(義烈祠)’라고 사액 되었다.
그 뒤 1694년에 오두인(吳斗寅)과 1788년에 김덕홍(金德弘)·김덕보(金德普)를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이후 1927년 후손들이 운리영당(雲裏影堂)을 신축하고 박광옥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祭享)하였다.
1999년 운리영당은 도시개발로 인하여 훼손되었고 본손 종중에서 운리사(雲裏祠)로 재건하여 제향해오고 있다. 2017년 의열사 복원이 무산되자 유림 대표들과 학자들의 발의로 의열국전(義烈國典) 향유(鄕儒) 제향을 복원하고자 운리사를 벽진서원으로 개칭하였다.
벽진서원은 박광옥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사당과 숭본당(崇本堂)을 포함하여 연건평 77.2평과 주차장 포함 총 부지 1,005평으로 조성되었다. 소장한 유물로는 유상(遺像), 양면 137면 69매 회재유집목판(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1996년 지정) 등이 있다.』
이번 탐방의 일정은 벽진서원에서 집결해 회재 선생의 업적을 영상으로 시청 후 전평제(예전,개산방죽)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에 있는 저수 시설. 개산방죽(현, 전평제)이라는 이름은 회재 박광옥(朴光玉)[1526~1593] 유허비(遺墟碑)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알리거나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에 등장한다. 회재가 나이 43세 때 농사를 짓기 위해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만든 것이 개산방죽(현, 전평제)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1568년 개산마을에 개산방죽(현, 전평제)과 함께 세운 수월당은 팔각 기단(基壇)에 고복형 주초석(鼓腹形 柱礎石)을 놓고 원형 기둥으로 세운 겹처마의 팔각형 정자다. 개방형 정자에는 정명(正名) 현판이, 내부에는 수월당복원문(水月堂復元文) 현판이 걸려 있다. 박광옥은 당시 수월당에서 고경명, 고경순, 이일원 등과 함께 시를 짓고, 고봉 기대승 선생과는 성리학에 대한 토론도 했다. 현재 수월당(水月堂)은 광주광역시 서구 전평제근린공원의 저수지 서쪽 인공섬에 위치한다.』
전평제와 수월당을 돌아보고 남원 운봉을 행해 1시간여 달려 점심 장소인 운봉읍 흑돼지 전문점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황산대첩비지로 향했다.
황산대첩비『황산대첩비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12년 전인 1380년(우왕 6) 9월에 삼도관찰사로서 남정(南征)하여 전북 남원은 운봉(雲峰) 황산(荒山)에서 발호하던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道)의 무리를 정벌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금석문이다. 황산대첩(荒山大捷)은 1380년(우왕 6년) 9월 이성계가 전라도 지리산 근방 황산에서 왜구를 격퇴시킨 싸움으로 유명하다. 1380년(우왕 6) 8월에는 진포에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침입, 충청·전라·경상 3도의 연안지방을 약탈·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다. 이때, 원수 나세·최무선 등이 화통, 화포로써 왜선을 격파, 전부 불태워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적은 더욱 발악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순찰사로 임명, 이 지방의 방위책임을 맡게 하였다. 적은 함양 운봉 등의 험지를 택하여 동서로 횡행하므로,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 각 부서를 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황산 북서쪽에 이르렀을 때 적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적은 산을 의지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성계는 고전에 빠졌으나, 이를 무릅쓰고 부하 장병을 격려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최영의 홍산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싸움이며, 이를 계기로 왜구의 발호가 쇠퇴하였다.
1577년(선조 10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황산대첩비를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에 세웠다. 비문에는 이성계가 아군보다 10배가 넘는 왜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을 이루었으며,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는 내용 등이 실려 있다. 건립 당시 황산대첩비를 수호하는 비각, 별장청 같은 건물을 지었는데, 지금도 그 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황산대첩비지는 사적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1575년(선조 8) 가을에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장계를 올려 ‘운봉 고을 동쪽 16리 밖 황산이 있는데, 태조 강헌대왕께서 왜구를 무찌른 곳이다. 세대가 바뀌면서 지명이 잘못 전해져 오가는 사람들이 찾으려하지만 벌써 분별하여 인증하기 어려움에 정말로 천백세 후에 높은 데가 뭉개지고 낮은 골이 메워져서 더욱 자취가 흐려져서 구분이 어렵게 되었다.
바라건대, 큰 비석이라도 우뚝 세워 길이 전하도록 함이 옳다. 이 고장 노소 백성들이 서로 모여 관청에 소청함에 지방을 다스리는 신하로서 모른 체할 수 없어 전하께 계달한다.’라는 내용이다. 또한, 위치와 경위,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적었다.
비석은 2년 후인 1577년(선조 10) 8월 운봉현감 박광옥(朴光玉)에 의해 건립되었다. 김귀영(金貴榮)이 글을 짓고, 송인(宋寅)은 글씨를 썼으며, 남응운(南應雲)은 전액을 썼는데 모두 선조의 명에 의해 임명되었다.』 지금으로 보면 정문인 삼문은 공사중이다.
탐방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벽진서원 박이채 보존회장은 기아국가유산지킴이를 지켜보고 이렇게 말했다. 기아라는 회사의 직원들이 매스컴에서 보았듯이 귀족노조, 노동운동으로 지역사회의 문제는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몇 년을 지켜보니 이렇게 열심히 활동하고 노력하는 동호회는 처음이라며 지금까지 겉만 보고 판단한 지금까지의 나의 마음이 미안했다고 말하고, 이번 탐방을 계기로 꾸준히 좋은 만남을 이어가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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