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국가유산지킴이와 벽진서원이 함께 남원 운봉 황산대첩비지 탐방 2탄

- 광주(光州)에 사는 유림 선비 박광옥(朴光玉)의 발자취는 용호서원까지 미치다.
- 가족과 함께 가는 남원 광한루에서 조선 초기의 재상이었던 황희(黃喜) 만나다.

한병기 시민기자 승인 2024.05.29 08:37 의견 0
기아국가유산지킴이와 벽진서원이 함께 황산대첩비지 탐방 전평제 수월당 앞에서 (사진 오현)

5월 26일 오후는 저녁에 비가 예보되어 있어 잔뜩 흐려 곧 비가 쏟아질 기세다. 하지만 여름처럼 무더운 요즘 오히려 날씨는 바람까지 불고 있어 탐방하기에 최고의 날씨었다. 탐방 1탄에서 황산대첩비지까지 살펴보았다. 2탄에서는 바로 옆 동편제의 태 자리 “비전마을”로 지리산 둘레길 2구간에 속해 있어 주변의 경치가 아주 빼어난 곳이기도 하다. 비전마을 앞 당산나무 그늘은 언제나 둘레길을 걷는 발길의 쉼터가 되어준다.

비전마을 앞 당산나무는 언제나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발길에 쉼터가 되어준다. (사진 오현)

여기는 동편제의 태 자리 “비전마을”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인 가왕(歌王) 송흥록 선생(1789년)이 태어난 곳이다. 조선 순조 때 화수리 비전마을에서 출생한 송흥록은 민속음악 가운데 가장 느린 진양조를 판소리에 응용하여 판소리의 표현영역을 확대하는 등 다양한 음악 기교를 사용함으로써 극적이면서도 예술적인 판소리를 완성한 인물이다. 특히 '춘향가'의 옥중가중 귀곡성(귀신 울음소리)은 그가 창작한 독창적인 판소리 창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송흥록의 판소리사에서 공헌은 진양조의 완성이다. 진양조의 개발에 관해서는 그의 매부 김성옥과의 일화가 전해진다.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 가왕 송흥록 생가

김성옥은 충남 강경 사람으로 당시대 명창이었으나 학슬풍(무릎이 붓고 아프며 다리 살이 여위어 마치 학의 다리처럼 된 병)으로 오래 고생하다가 요절하였다. 그의 소리는 그의 아들 김정근을 통해 이어져 중고제 소리가 되었다. 김성옥은 학슬풍으로 오래 누워 지내는 사이에 진양조를 개발하였는데 송흥록은 이를 오랜 기간 연마하여 진양조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진양조는 판소리 장단 중 가장 느린 대목들에 많이 쓰인다. 또한 양반의 음악인 정악의 특성을 간직한 곳도 많다. 이러한 특성이 진양조의 개발을 통해 양반들의 음악을 판소리화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흥록 선생으로부터 출발한 동편제는, 형의 고수로 지내다가 뒤에 형에 버금가는 명창이라는 소리를 들은 아우 송광록과 손자 송만갑이 대를 이어온 이후 계층과 지역을 초월한 광범위한 애호를 받는 예술로 부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이 죽고 난 후 무덤에서는 ‘내 소리를 받아가라'라는 귀곡성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송흥록은 철종으로부터 정삼품 벼슬인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았다. 현재 운봉의 비전마을에는 그가 살았던 집과 함께 마을 입구에 그의 탄생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운봉은 송문일가의 고향임과 동시에 인간 문화재였던 박초월 명창의 고향이기도하다. 박초월이 살았던 집이 아직도 비전마을에 남아있다. 2000년부터는 비전마을에 국악성지가 조성되며 송흥록 선생 생가와 박초월 명창 고택이 복원되었다.』

지리산 정령치 자락에 구룡계곡 끝자락에 모여있는 용호서원, 육모정, 춘향묘

이곳에서 다시 출발해 정령치를 내려와 구룡계곡의 끝자락에 모여있는 육모정과 춘향이 묘, 용호서원이 같은 공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용호서원은 『 설립 당시 봉안되었던 주자 영정은 1555년(명종 10)에 광주(光州)에 사는 유림 선비 박광옥(朴光玉)이 명나라에 서장관 신분으로 파견되었을 때, 중국의 주자와 여대균의 영정을 들여와서 남원부 원천방의 풍천노씨 집에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고종 3) 용호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후 여러곳을 떠돌다. 일제강점기에 김종가가 1927년 용호서원을 설립하면서 시설을 확충하고 경양사와 작은 강당을 짓고서 후학을 지도하면서부터 현대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주자 영정은 2003년 즈음에 다시 주천면 호경리 마을로 되돌아와 보관되고 있다.』 사실 용호서원은 지금 후손들도 아무것도 아는바가 없다고 전한다. 또한 육모정은 정령치와 구룡계곡의 등산객들의 전유물이 되어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다. 성춘향의 묘는 가지런히 정돈이 된생태로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푸르름이 넘치는 날 좋은 사람과 좋은 인연으로 나선 남원 광한루 탐방

이후 마지막 일정인 광한루로 향한다.
남원을 이야기할 때 광한루이고 광한루를 이야기할 때는 춘향전이다. 광한루원은 춘향전의 무대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누원으로 유명하다.
기아국가유산지킴이는 광한루원에서 가족 단위로 탐방을 했다.

광한루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본래 이 건물은 1414년(태종 14년) 조선 초기의 재상이었던 황희(黃喜)가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 하였고 1434년에 중건되었는데, 정인지(鄭麟趾)가 이를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하면서 광한루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타 버렸고, 현재의 건물은 1638년(인조 16)에 재건된 것이며, 장의국(張義國)이 누각 앞에 연못을 파고 오작교를 가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여년 전에 다녀 갔다는 오작교를 거닐어 보는 이형만고문(기아국가유산지킴이의 보물이다.)

푸르름이 넘치는 5월 광한루원을 거닐어 보니 신선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가족 단위로 탐방을 와 보니 조용하기도 하고 가는 곳마다 해설사님들의 해설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고 했다. 자녀와 같이 탐방에 나선 기아국가유산지킴이 손경모 총무는 딸아이가 요즘 사춘기를 격고 있었는데 같이 거닐며 이야기도 많이하고 고민상담까지 하고 보니 서로가 관심이 멀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돌아가면 오늘처럼 대화도 많이 하자고 약속도 했다고 말했다. 또 아들과 같이 온 엄마는 가끔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활동에 아들과 동행을 했는데 올봄에 아들이 취업에 성공해 더 이상은 함께 참여하기가 어려울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이 앞선다고 했다.

벽진서원과 함께 탐방길에 기아국가유산지킴이들의 모습

이처럼 가족과 함께하는 탐방은 이야깃거리가 많아서 좋다. 이런 기회를 많이 만들어 보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탐방은 기획해 주신 벽진서원 관계자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며, 추후 더 많은 정기활동과 교류활동을 통해 서로 win-win 하는 관계가 지속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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