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0일 광주 서구자원봉사센터에서 실시한 “2024 같이 × 가치 자원봉사단체 우수프로그램 공모 사업”에 선정되어 6월 4일 임원 오리엔테이션에서 취지설명과 역할분담 그리고 강사 구성까지 마치고 11월 6회차까지 열심히 달려보기로 다짐했다.
2024년 우수프로그램 공모 사업은 “AI도 할 수 없는 국가유산지킴이 청소년과 함께하면 지킬 수 있어!”라는 주제로 6회차로 진행이 된다.
6회차를 진행하는 강사로는 회원 전원이 참여해 꾸려지고 강의와 체험을 분류해 진행해봄으로써 회원들의 해설 및 강의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고자 편성을 했다.
1회차 청소년 자원봉사와 국가유산지킴이 활동이란?
자원봉사는 “어떤 일을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자원봉사의 필요성은 "자원봉사는 남을 위해서 돕는 활동이지만, 나 자신에게도 좋은 효과가 있다."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원봉사는 가장 중요한 4가지 특성이 있다.
국가유산이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우리나라의 소중한 유산을 말한다.
국가유산 중에 국가지정유산이란 국가유산 청장이 문화유산법·자연유산법·무형유산법에 따라 설치된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한 국가유산으로서 국보·보물·국가 무형유산·사적·명승·천연기념물 및 국가민속문화유산 등 7개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 외 시·도 지정유산, 문화유산자료·자연유산자료, 국가등록문화유산, 시·도 등록문화유산, 비지정유산으로 분류하고 있다.
국가유산지킴이란? 우리의 소중한 국가유산을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가꾸고 지켜나감으로써, 이제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국가유산뿐 아니라 ‘국가유산을 가꾸는 문화’도 후손들에게 함께 물려주고자 추진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국가유산 행정의 당면한 한계(인력, 예산, 조직)를 극복함은 물론, 국가유산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잇는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특히 모든 국민이 관리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소외된 국가유산’을 찾아, 생활 속에서 지속해서 가꾸고 즐김으로써 국가유산을 더욱 가깝고 친근한 존재로 함께 하고자 추진하게 되었다.
자원봉사 교육과 국가유산, 국가유산지킴이 활동에 대해 알아보고, 벽진서원일원에 정화활동을 실시하고 마무리했다.
박광옥 朴光玉(1526~1593)은
『조선 중엽 명종과 선조 때에 성리학을 연구하고 향약을 널리 실시해 이름을 세우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의기로운 선비이다.
박광옥의 본관은 음성陰性.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할아버지는 박자회朴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 박곤朴鯤이며, 어머니는 찰방 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광주시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범상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기록이 국역된 《회재집》에 있다. 어릴 때부터 이미 동량이 커서 소꿉장난을 하지 않았으며 일곱 살 때 아버지상을 당했는데 어른처럼 통곡하며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형 박광현은 성격이 엄격하여 아우를 가르치는 데 총력을 다했고 회재도 형을 아버지처럼 섬기며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면학에 힘썼다. 21세 때인 1546년 생원 진사에 합격했으나 형이 세상을 뜨자 가풍을 이어받아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광주 선도면(지금의 매월동)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山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고 향약을 실시했다. 당대의 학자로 이름난 기대승, 박순, 이이, 노사신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560년 목사 유경심을 도와 향교를 중수하고 학헌과 학규를 제정하였다.
156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에 임명되었다. 1574년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가 되었으며 1577년 운봉 현감이 되었을 때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1578년 전라도사, 충청도사, 1579년 예조정랑, 1580년 지평이 되었다. 그 뒤 성균관직강을 거쳐 영광군수.밀양부사가 되어 영광과 밀양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뒤에 광주·전주의 교수와 사예. 사섬시정.봉상시정 등에 재직하였다.
박광옥은 광주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구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경명,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왜병이 상주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듣고 수레를 타고 달려가 정윤우 광주목사에게 근왕병을 일으켜 험악한 요새지를 차단하고 서울을 호위케 한 다음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정윤우(丁允祐)는 전라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에게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는 의리를 극력 말했어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자제들을 가담시키고 군량을 많이 보냈다. 광주에 의병도청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조달했다. 그런 와중에 복직하라는 어명이 내려오자 승문원((承文院): 다른 나라와의 외교문서를 관리하는 관청) 판교에 올랐다가 나주 목사로 내려왔다.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이라 사양할 수 없어 어렵사리 부임했으나 겨우 껍질을 벗긴 곡식밥을 먹었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울면서 “임금은 어디 계시며 이때가 어느 때냐”고 말했다고 전한다. 지방수령의 세력으로 재차 의병을 규합해 이전에 가졌던 뜻을 이루려고 했으나 병세가 위독해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병가를 내가 집에 돌아와 1593년 생을 마감했다. 선조는 그에게 호남의 충의신이라 극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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