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에 충현원을 아시나요?

- 가까이 있는 문화유산을 뒤로 하고 멀리 있는 유산을 찾아다녔다.
- 더 알리고 가꾸어 나아가면 좋겠다

한병기 시민기자 승인 2024.06.25 17:54 의견 5
지금은 굳게 닫힌 충현원의 정문 (충현원 안에는 하루빨리 시민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한다.)(사진 한병기)

2024년 6월 23일 오후 4시 지인의 소개로 충현원[광주 남구 제중로 84(양림동 210)]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양림산에 있는 충현원에 가기 위해 약속을 하고 고민이 많아졌다.

사직공원 전망타워 아래 위치한 충현원

평소 충현원 인접해 있는 양림동(팽귄마을), 사직산, 성거산, 사직공원, 광주공원, 근대문화에 관한 관심과 열정으로 돌아다녔지만, 이곳 충현원에 대해 처음 접하는 곳이어서 그랬다. 아마 광주광역시에 거주하는 사람 중 몇몇을 제외하곤 아는 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문이 생겼다. 왜 이렇게 시내 한복판에 있음에도 아무도 알지 못할까? 이곳 관계자의 설명과 투어를 통해 조금은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 과정이고 많은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은 이곳 충현원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기로 하자.

양림동 역사길 투어에 같이 동참했던 때

충현원은 우리가 조금은 알고 있는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을 찾아보면 미국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보면서 들어본 이름들이다. 미국남장로교회 소속 Robert Wilson(로버트 윌슨, 1908년~1926년) 선교사와 Robert Knox(로버트 녹스, 1926년~1951년) 선교사와 함께 선교부에서 동역하던 어머니 박애신(1883년~1968년)의 영향을 받은 박순이(1921년~1995년) 선생에 의하여 1949년 우월순 선교사 댁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19:19)라는 기독교 정신 아래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전쟁고아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설립 운영하였다. 시설을 찾는 고아는 점점 늘어 공간이 부족 하자 故 박순이 선생은 사재 5,000환을 털어 양림동 부지(제중로 84, 86)를 구입(1951년)해 확장 운영하였다. 양림동에 있었던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13명의 선교사들도 꾸준히 의약품과 의류, 음식 등을 후원해주었다.

충현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동상(6.25당시 미군 군목으로 참전한 러셀 로이드 블레이즈델 대령 : 종전 후 복귀를 거부하고 한국전쟁고아를 구출시킨 한국판 쉰들러 리스트) 앞에서 관계자와 기념사진

1972년부터 산업사회로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사회복지사업에서 사회문제 예방 차원의 복지사업으로 아동상담소, 어린이집, 국내외 입양기관, 거택보호 사업으로 소년·소녀 가장 학자금지원, 고아 전용 아동병원, 고아를 위한 치과 진료, 가출청소년 귀가를 목적으로 한 사랑의 집, 종합사회복지관을 지방에서 최초로 운영하였다.

이 무렵 1976년 네덜란드 아동재단 후원으로 광주 최초 어린이 공동 놀이터를 마련 광주시에 기증하였다. (현 사직도서관, 영상문화원, 오방 최흥종기념관, 유진벨선교기념관, 양림미술관 자리) 애초 고아 없는 세상을 추구한 故 박순이 선생의 정신에 감동하여 보낸 한화 아동 재단 기금으로 고아 전용 병원을 신축하려 했으나, 충현원부지가 1967년부터 도시공원계획에 묶여있어 보내온 기금과 김양(金洋, 故 벅순이의 아들)의 개인 자산을 합해 당시 같은 관할구역인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운천길 111(쌍촌동 88-5번지)을 사들여 그곳에 지방 최초의 복지관인 호남종합사회복지관을 건립 운영하다가 관계 관공서와 여러 가지 불협화음으로 2013년 8월 자진 폐쇄하였다.

지금은 전시관으로 되어 있지만 최초에는 아이들을 케어하는 어린이집, 병원 등으로 사용했다. 이곳은 전쟁고아들의 황달까지 치료할 수 있도록 조명까지 남다른 설계를 했다.

이처럼 최초, 선교, 고아, 사회복지라는 수식어 따라다닌 충현원은 현재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의문이 들이 않을 수 없다.

앞뜰과 뒤로보이는 기념관(좌)과 보육원(우) 건물이다.

설립자 故 박순이 선생은 1995년 2월 1일 소천하신 후 충현원의 대표이사를 떠맡은 유해량씨는 10여년 동안 설립자 故 박순이 선생의 발자취에 대해 보물찾기 처럼 찾아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2005년 5월 미국남장로교회 박물관에 Mrs. 브르스 커밍에 의해 보고 된 “박순이와 한국전쟁의 고아들”에 대한 선교보고서를 만난 후 2009년 5월까지 故 박순이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다녔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신”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이전에 살아온 기적으로 이후에 살아갈 기적을 만들어가는 나침반으로 삼고자 오늘도 충현원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살피며, 충현원의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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