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국가유산지킴이는 2024년 처음 재계한 스터디에 나주향교를 찾았다.

▷ 나주향교만의 특별함을 찾아 돌아본다.
▷ 나주향교의 위상과 앞으로 지켜가야 할 지킴이의 역할을 이야기해 본다.

한병기 시민기자 승인 2024.07.05 05:56 | 최종 수정 2024.07.07 13:10 의견 2
나주향교 대성전에서 가아국가유산지킴이 스터디 활동중

2024년 7월 2일 기아국가유산지킴이는 나주향교를 찾아 향교가 가지는 특별함과 수백년 나주를 지켜온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나주향교는 조선시대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으로, 전국 234개의 향교 중 전국 3대 향교로 불리는 명성을 자랑한다.

나주향교는 태조 7년(1398)에 지었으며, 내부에 계성사라는 사당이 있는데 이곳에는 공자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로 인해 향교의 배치방법이 다른 향교와 다르다. 대부분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배움의 공간을 앞에 두고, 뒤에 제사 공간이 있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계성사가 있어 대성전과 명륜당의 위치가 바뀐 전묘후학을 따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책 등을 지금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제사만 지낸다. 이곳에 보관된 책은 이 지방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나주는 삼국시대 때부터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으로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고, 고려왕조부터 조선왕조까지 약 1,000년 동안 목(牧)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한 전라도의 대표적 큰 읍치이었으며,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이 그에 상당한 권위를 보여주고 있어 상당한 가치가 있다.

3D로 내려다 본 나주향교 배치

나주향교는 평지에 들어선 전묘후학의 배치형태를 띠고 있는 전형적인 예이며, 특히 보물 제394호로 지정된 대성전은 그 규모가 대단히 웅장할 뿐 아니라 양식, 격식이 뛰어나 조선 후기 향교건축을 대표할 수 있어 건축학적 가치가 크다. 또한, 나주향교는 조선 시대 교육시설의 규모를 따지면 성균관 다음이라고까지 지칭될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교육과 제사의 고유기능을 간직하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나주향교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으로

▶ 조선의 국가유산지킴이 김애남 이야기(충복사유허비忠僕祠遺墟碑)

나주향교 입구에 가면 여러 비석이 한데 어울려 서 있는 것이 보이는데 그 중 눈여겨봐야 할 것이 1924년에 세운 <충복사유허비忠僕祠遺墟碑>이다.

이 비는 김애​남(金愛南)이라는 한 충직한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몰려와 제일 먼저 했던 짓이 향교(교육기관)를 없애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향교가 위태롭다고 판단한 당시 나주향교의 ​대성전 수​복(首僕)이던 김애남이 죽음을 무릅쓰고 대성전 위패를 안전하게 금성산으로 피신해 위패를 지킬 수 있었다고 전한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 이 소식을 나라에서 듣고 노비 신분이었던 김애남과 그의 자손들을 면천(免賤)시켜 주었고, 김애남이 죽자 충복사(忠㒒祠)를 지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것이다. 지금 비림이 있는 자리가 충복사가 있던 곳으로 세월이 오래 되어 폐허가 되자 1922년 나주 유림들이 지금의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에도 다양한 행사를 꾸미고 있는데 그 중 김애남을 기리는 창작극이 볼만하다.

향교 입구 1924년에 세워진 충복사유허비

▶ 대성전 초석

대성전의 기둥을 떠받치는 초석에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는 유교적 공간으로 연꽃무늬는 불교적 유물로 인식된다. 그런데 왜 초석에 연꽃이 새겨져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하는 말로 그 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핍박받고 사라진 주변 사찰의 초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하고 있다.

대성전 초석이 남아있는 이유는 돌로 되어 불에 타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 동재와 서재

동재는 명륜당 동쪽에 있는 건물로 양반 신분의 유생들이 글공부도 잠도 자는 공간으로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역할은 했다. 규모는 다른 향교와 비교해 큰 편에 속한다.

서재는 명륜당 서쪽에 있는 건물로 상민 출신의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원래는 동재와 서재의 구분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신분의 변화가 오면서 신분에 따라 구분을 했다고 한다.

동재와 서재 건물 곳곳에 차이를 두어 양반사회와 양민을 구분하였다. 창살, 아궁이, 출입문 등에 차이를 두었다.

중앙에 보이는 명륜당 양쪽에 배치된 동재와 서재를 김종신해설사

▶ 향교 안에 나무 이야기

조선 시대의 우리 선조들은 약효를 지닌 열매를 선사하거나 맑은 정신을 가지게 만드는 나무를 심었다.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넓은 앞마당 담장 옆에 우뚝 솟은 보호수 비자나무와 은행나무로 각 수령이 500년, 600년을 살아가고 있다.

- 은행나무 : 나주향교 대성전 동무 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속설에 의하면 600여 년 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심은 나무라고 전한다. 이후 나주 고을을 지금까지 지켜온 수호목이자 신목으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에는 600여 년 전 이성계가 심은 게 아니고 정도전이 심은 것이 아니냐는 설도 돌고 있다.

시대의 수난에도 아무말없이 나주향교를 지키는 은행나무(누가 심었을까?)

- 비자나무 : 옛날엔 갑작스럽게 찾아온 잔병을 다스릴 마땅한 치료제가 없을 때 나주향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도 갑자기 찾아온 복통 등 잔병의 치료제를 쉽게 구하기 위해 구급대용인 나무를 심었다. 은행나무 열매는 해열제로 비자나무의 열매는 복통에 효과가 있다.

비자나무도 현재 수령이 오래돼 갈라지고 구멍이 생겨나고 늙은 나무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전한다.

지금 가장 잎이 우거진모습으로 건강해 보이지만 노목으로 안타깝다.

위에서 나주향교를 특별함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이번 스터디에 같이 해주신 신입회원이자 나주해설사로 활동중인 김종신해설사와 함께한 이유다. 올해 신입회원으로 가입한 이유가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본인이 생각하는 지킴이 활동의 참모습으로 여겨 꼭 같이 활동을 해보고 싶어 가입을 결심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김종신해설사가 전하는 말은 나주향교를 찾으면 꼭 눈여겨봐야 할 곳으로 나주목 관아를 말했다.

나주향교를 지나 금성관에서 비석군을 해설중인 김종신 신입회원

이날 스터디를 마친 후 저녁과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올해 스터디 계획으로 우리 고장에 향교를 돌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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