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에 접어들면 삼국의 대외적인 환경은 크게 요동쳤는데, 외형적으로 보면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의 전성기가 이어질 것 같았지만, 그동안 앙숙이었던 고구려와 백제가 손을 잡고 신라를 침공하며 수세에 몰렸던 시기다. 특히, 신라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치세 때 고구려와 백제의 파상공세 속에 위기에 놓였던 시기로, 이를 보여주듯 국경의 주요 요충지에서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졌다. 이 중 주목해 볼 장소가 바로 ▶당항성(党項城) ▶칠중성(七重城) ▶대야성(大耶城) 등이다.
■ 고구려와 백제가 당항성을 탈취하려 한 이유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 32번지, 구봉산의 정상을 감싸고 있는 화성 당성은 과거 당항성(党項城)으로 불리던 곳이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이 지역은 고구려 때 당성군(唐城郡)으로 불리다 경덕왕 때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당성군이 된 바 있다. 당항성은 7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과 공세 속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당나라와의 외교에 사활을 걸었는데, 그 연결고리가 되었던 곳이 바로 당항성이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당항성은 642년(선덕여왕 11) 8월,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해 당항성을 빼앗으려 했는데, 그 이유가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기 위함이었다. 이에 신라는 다급히 사신을 당 태종에게 보내 이 사실을 고했다. 이에 당나라는 644년(보장왕 3)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고구려 파견해 군사를 철수하고, 전쟁을 그만둘 것을 이야기한 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도 했는데, 사실상의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당 태종은 사신이 돌아온 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영류왕(榮留王, 재위 618~642)을 시해한 것과 신라를 침략한 것을 명분으로 삼아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이것이 1차 고구려 원정(645)이었다.
이러한 당항성으로 확인된 화성 당성은 구봉산 정상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으로 쌓은 1차 성벽이 확인되었다. 또한, 발굴조사를 통해 의미 있는 명문 기와들이 출토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당(唐) ▶한산(漢山) ▶본피모(本彼謨) ▶양모(梁謀) ▶관(舘) ▶관택(舘宅) ▶관(官) 등이다. 이 중 본피모 기와의 경우 신라 6부 중 본피부가 화성 당성의 축조에 관여한 것을 알려주는 유물로 보이며, 성 내 관청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와 명문도 확인된 바 있다. 당항성을 통해 신라는 당나라와 나제군사동맹을 성사시켰고, 그 결과 삼국통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당항성의 지정학적 가치는 작지 않다.
■ 임진강 방어선의 핵심 요충지인 칠중성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산 148번지에 있는 칠중성(七重城)은 성벽의 일부가 잘 남아 있으며, 정상부를 중심으로 군부대의 진지가 남아 있을 만큼 중요한 지정학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임진강이 고구려와의 국경이 되었기에 칠중성은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 지역은 고구려 때 칠중현(七重縣)으로 불렸으며, 신라가 차지한 뒤 중성(重城)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재의 지명인 적성(積城)으로 바뀌었다. 임진강의 경계로 했던 삼국시대 후반부의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는데, 임진강을 따라 늘어선 ▶연천 호로고루 ▶연천 당포성 ▶연천 은대리성 등의 고구려 성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고구려의 입장에서 보면 신라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칠중성을 반드시 거쳐야 했기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칠중성에서는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첫 전투는 638년(선덕여왕 7) 10월로, 이때 고구려가 칠중성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선덕여왕은 대장군 알천(閼川)을 파견했고, 이에 보답하듯 알천은 칠중성 밖에서 고구려 군대를 물리치며 승리를 거두었다. 두 번째 전투는 660년(무열왕 7) 11월로, 이때는 고구려는 백제가 멸망하자 신라를 침공했는데, 그 중심은 칠중성이었다. 이 때 칠중성을 방어했던 이가 필부(匹夫)였는데, 고구려의 공격에도 20여 일 간 잘 버텼다. 이에 고구려가 퇴각을 준비했으나, 이때 대나마(大奈麻)로 있던 비삽(比歃)이 성의 양식이 떨어진 것을 고구려에 알리자 다시 고구려가 쳐들어 왔고, 이에 필부는 비삽의 목을 베면서 마지막까지 항전했으나 끝내 전사했다. 필부가 전사하자 무열왕(武烈王, 재위 654~661)은 애통해하며, 그를 급찬(級湌)으로 추증했다.
한편, 고구려가 멸망(668) 한 뒤에도 칠중성은 나당전쟁 시기의 중요한 전장이었다. 675년(문무왕 15) 2월에 당나라의 유인궤(劉仁軌)에 의해 칠중성이 함락되었고, 이에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은 당 황제에게 사죄사를 파견했다. 물론 이 사죄사는 진심이라기보다는 국면 전환을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제 같은 해 9월 29일, 신라는 매소성(買肖城, 매초성)에 주둔 중이던 당의 20만 대군과 싸워 이겼는데, 이 전투가 바로 매소성 전투였다. 이후 신라는 676년(문무왕 16) 기벌포 해전에서 승리하며, 나당전쟁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 뚫리면 서라벌(徐羅伐)이 위험했던 전략적 요충지, 대야성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산 2번지, 매봉산을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대야성(大耶城)은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황강의 자연 해자를 구축하고 있으며, 현재 성의 북벽 일부가 확인되고 있다. 대야성이 있는 합천은 가야 연맹 중 다라국(多羅國)이 있던 곳으로,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뒤 대야성, 대량주군(大良州郡)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때 강양군(江陽郡)으로 고쳤다.
대야성의 안위는 곧 수도인 서라벌(徐羅伐)의 안전과도 직결이 될 정도였다. 이러한 대야성이 역사에 전면을 드러낸 건 642년(선덕여왕 11)으로, 8월에 백제는 고구려와 손잡고 당항성 탈취 시도를 하는 한편, 또 다른 요충지인 대야성을 점령하기 위해 윤충(允忠)에게 군사를 주어 공격하게 했다. 그 결과 대야성은 함락이 되는데, 그 과정은 <죽죽> 열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대야성의 성주는 이찬 김품석(金品釋)으로, 전투가 있기 전 그는 부하 장수인 검일(黔日)의 아내를 빼앗았고, 결국 검일이 백제에 내응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김품석은 살려준다는 이야기에 백제에 항복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김품석과 그의 아내인 고타소(古陁炤)가 죽임을 당했다. 또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죽죽(竹竹)과 용석(龍石) 등이 전사했다. 김품석의 이러한 행동은 항복에 반대하며,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죽죽(竹竹)이 충신의 표상이 된 것과 대비된다.
그런데 김품석의 아내인 고타소(古陀炤)는 김춘추의 딸로, <삼국사기>를 보면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金春秋, 태종무열왕)는 이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야성 함락은 신라 조정에 있어 발등의 불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이는 대야성을 포함해 그 인근 지역들까지도 백제에 넘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간단치가 않았다.
또한, 방어적인 측면에서 대야성이 뚫린 뒤 수도까지 마땅한 방어할 만한 요충지가 없었기에 다급히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압량주(押梁州, 현 경북 경산)의 군주가 되어 군대를 주둔하며 방어해야 했다. 또한, 김춘추의 입장에서는 딸이 죽은 것도 문제지만, 사위가 백제에 항복해 대야성의 항복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기에 정치적 부담이 상당했다. 결국 상황을 반전시키고,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김춘추는 고구려와 왜로 건너가 청병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건너간 당나라에서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군사 동맹의 성과로 이어졌다.
한편, 대야성은 후삼국 시대에 다시 한번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는데, 920년(경명왕 4) 후백제의 왕인 견훤(甄萱)은 세 번의 시도 끝에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927년(경애왕 4)에 견훤은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로 쳐들어가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이때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을 잡아 자진하게 했다. 대야성이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이후 견훤은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는데, 이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6)이다. 이처럼 대야성은 신라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충지이자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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