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수리 시설

용두보(龍頭洑)를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4.08.16 12:36 | 최종 수정 2024.09.16 22:35 의견 44

극성을 부리던 무더위가 조금은 수그러든 8월의 끝자락에 밀양강 중류에 있는 용두보(龍頭洑)를 찾았다. 이곳은 오랜 세월의 강물이 만들어낸 절벽지형으로 밀양강, 용두산, 용두연, 용두보, 천경사 등을 품고 있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용두산은 산성산(山城山, 391m)에서 뻗어 내린 그 모양이 용두(龍頭, 용 머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 아래쪽 깊은 곳이 용두연(龍頭淵)인데 옛 밀양 8경의 하나로 ‘용두야우(龍頭夜雨, 용두산에 내리는 밤비)’라고 하여 아름답고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다.

밀양설화집(密陽說話集, 밀양시, 2009)에는 이곳 깊은 수중에는 전설 속에 나오는 용궁(龍宮)이 있어 용왕의 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친 춘화 선사가 용궁을 구경하러 갔다가 몰래 밤 한 톨을 숨겨 나와 선불(섬벌, 활성밤밭)에 심어 퍼뜨렸다는 맛있는 황율(黃栗)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조선 후기의 필사본인 밀주구지(舊州舊誌)에는 1628년(인조 6년) 밀양에 심한 가뭄이 들어 당시 부사 정두원(鄭斗源)이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려 그 정성으로 비가 내렸는데, 사람들은 그 비를 태수비(太守雨)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용두연 전경

1980년대 초까지하여도 이곳은 ‘용두연유원지’로 불리는 여름철의 대표적 피서지로 보트장이 개장되어 많은 방문객이 찾는 밀양의 관광 명소(名所)였다. 또한, 이곳의 맑은 강물에는 수박 향 나는 밀양 명물 은어(銀魚)가 많아 낚시꾼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강물의 수질도 나빠지고 주변의 지형(地形)도 많이 바뀌어 반짝이던 은빛 모래사장도 사라지고 은어도 볼 수 없게 되면서 사람들의 발길마저 뜸하게 되었다. 한때 번성했던 강변의 민물 횟집을 뒤로하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밀양강을 가로질러 설치된 긴 콘크리트 보(洑)가 시야에 들어온다. 갈림길에서 아래쪽의 금시당 수변 길로 들어서니 방문객을 마중이라도 나온 듯 용두보 안내판이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용두보는(龍頭洑) 당시 우리나라 근대 토목 기술로는 획기적인 수리 시설로 밀양강 너머의 넓은 상남 들판에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건설한 보(洑)이다. 일본 강산현 출신의 마쓰시타 데이지로(松下 定次郞)가 1904년부터 1907년까지 거액의 자비(自費)를 들여 건설하여 일명 송하보(松下湺) 또는 송하정차랑보(松下定次郞湺)라 부르기도 한다. 1904년 경부선 철로 부설공사를 위해 밀양을 방문했다가 마침 농업용수가 부족하여 불모지와 같았던 상남면 지역의 들판을 보고는 밀양강 중류의 용두보 건설에 착안(着眼)하였다. 1923년에는 농민들이 그의 공덕(功德)을 기리기 위해 가곡동에 동상을 세웠지만, 해방 후 반일 감정으로 부서지기도 하였다. 용두보 건설로 넓은 상남 평야는 밀양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거듭날 수도 있었지만, 인근의 밀양역을 이용해 일제(日帝) 식량 수탈의 전진기지 역할이 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용두보(도수로)

용두보 물길은 총연장 150m의 도수로(導水路,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와 연결되어 있으며, 강물과 맞닿은 용두산 허리를 관통한 통수로(通水路, 터널 수로)를 거쳐 가곡행정복지센터 부근에서 밀주초등학교 교문 앞을 지나 제2 수중보 근처까지 폭 3m, 깊이 2.5m의 수로를 따라 흐르다가 밀양강 인접까지 다다른 물길은 다시 강 아래로 설치된 U자형 지하 관(管)을 통과해 예림마을 입구에서 지상(地上)으로 올라와 다시 수로를 따라 상남 들판에 이르게 된다. 용두보에서 연결된 물길은 총 6.4㎞에 달하며, 수로를 통해 흘러나온 물은 1907년 당시 우리 정부의 인가를 받아 관리‧운영하였는데, 이를 위해 밀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리조합이 창립되었으며, 이후에 농지개량조합, 농어촌진흥공사, 농업기반공사라는 기관명을 거쳐 지금의 한국농어촌공사가 되었다.

용두보는 별도의 동력 없이 수압(水壓)을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당시의 최신 토목 기술이 집약된 시설로 강바닥 밑으로 들어간 물이 수압(水壓)을 이기지 못해서 솟구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용두보는 그 당시 기술과 장비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획기적인 발상인 데다 현재의 기술로도 복원하기 힘든 우리나라 근대 수리 시설의 효시(嚆矢)로 인식되고 있다.

용두보(취수문)

근래에 용두산을 관통한 물길은 가곡동 복지센터 근처에서 밀주초등학교 정문 앞을 지나서 강변 근처까지 복개(覆蓋)되어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점은 깎아 지른 바위 절벽(絕壁)에 물길 터널을 뚫은 일도 대단하지만, 어떻게 강바닥 아래에 지하수로를 낼 방법을 생각해 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주변 지인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용두보의 설치와 복개된 물길의 내력(來歷)을 잘 모르고 있다. 이는 어른들의 잘못이다. 구전(口傳)되는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삶의 역사는 누군가 기록으로 남겨 자라는 세대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학창 시절에 용두보 수로(水路)의 맑은 물에서 물놀이도 하고 고기잡이하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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