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구형왕이 나라를 바친 곳

이궁대(離宮臺)를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4.09.17 17:28 | 최종 수정 2024.09.17 18:25 의견 0

아득한 예전부터 밀양과 김해는 낙동강이라는 큰 물줄기가 경계를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찬란했던 금관가야와의 교류(交流)는 활발하지 못했다. 밀양 지역은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의 유적‧유물들이 고루 출토(出土)되고 있지만, 유독 가야와 연계된 흔적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만어사 창건 설화에서 가락국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 설화이고, 밀양 땅에서 가야와 관련되어 언급되는 소중한 장소가 이궁대(離宮臺)이다.

밀양시 초동면 검암리 곡강마을 오른편의 펑퍼짐한 공간을 품고 있는 구릉지(丘陵地)를 이궁대라 부른다. 벼랑 밑으로는 넓고 푸른 낙동강이 말없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김해와 창원 땅이, 서북쪽으로는 함안과 창녕 남쪽 땅이 그려지는 전망(展望) 좋은 곳이다. 강물은 남쪽 바다로 흘러가고 이곳에서 펼쳐지는 사방의 경치는 빼어나게 아름답다.

이궁대 전경

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1145)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 22대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 때 낙동강 건너의 금관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장군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진을 쳤던 곳으로, 임금의 순행 시에는 행재소(行在所, 임금의 행차 시 잠시 머무는 곳)로 이용되었다. 서기 532년(법흥왕 19)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仇衡王, 10대)이 왕비(王妃)와 세 왕자(노종, 무덕, 무력) 등을 거느리고 나라를 바치기 위해 궁을 떠난 곳이라 해서 이궁대라 불린다. 가락국을 떠난 구형왕의 엄숙하고 비장한 행차는 수산진(水山津)을 건너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에게 항복을 청하며 나라를 바쳤다고 한다. 법흥왕은 구형왕과 그 자제들을 신라의 귀족으로 삼았으며, 가락국 땅을 식읍(食邑, 국가에서 공신에게 내리어 조세를 개인이 받아 쓰게 하던 고을)으로 하사하였다. 구형왕은 아들 셋을 볼모로 남기고 수창궁(壽昌宮)으로 돌아와 얼마나 많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지….

그로부터 5년 후에 구형왕은 패망의 한(恨)을 품고 “500년 사직(社稷)을 지키지 못한 죄인으로 선왕(先王)들께 부끄럽다며 나의 무덤을 돌로 덮어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래서인지 한국의 피라미드로 회자(膾炙) 되는 산청의 구형왕릉(仇衡王陵, 사적)은 돌로 쌓은 독특한 무덤 양식을 하고 있다.

신라의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낙동강 유역의 곡창지대 장악(掌握)을 위해 밀양의 삼랑진과 수산진 등을 전초기지로 삼아 남쪽의 김해(금관가야), 서쪽의 창녕(비화가야), 함안(아라가야) 등 가야연맹제국 진출을 꾀하여 6세기 초에 이르러 가야제국 맹주국의 하나인 금관가야의 김해평야를 차지하고, 이어 가야연맹제국을 굴복시키고는 끝까지 항거하던 고령(대가야)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그때가 바로 서기 562년(진흥왕 23)인데, 이 무렵에 진흥왕(眞興王, 재위 기간 540∼576)은 이궁대에서 순행(巡幸)과 유연(遊宴)을 즐기며 전승을 기념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신라 문무왕(文武王, 김춘추)과 김유신(金庾信, 구형왕 증손자, 무력의 손자)은 삼국 통일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궁대의 아래쪽에 자리 잡은 곡강은 지방도(1022호)가 통과하는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이 마을 안쪽에는 낙동강 본류(本流)가 흐르는데, 강줄기가 굽어져서 마치 곡수(曲水)의 풍취를 방불케 한다고 하여 곡강(曲江)이라 불린다. 이곳에는 조선조 선조 때 백난(白蘭)이란 사람이 옮겨와 살았으며 후손들이 그의 묘소 아래에 영모재(永慕齋)라는 재사를 지어 보존하고 있다. 또한. 강변 언덕배기에는 중종반정의 공신 성산군 이식(李軾)의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내려 준 땅)에 아들(덕창)이 세운 곡강정(曲江亭)과 밀양(내진)의 벽진이씨 후손들이 문중 29현(賢)의 덕업을 기리기 위해서 1971년에 건립한 팔각의 2층 누각인 팔문각(八門閣)이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곡강마을 전경

이궁대는 비록 작은 야산이지만 사방으로 전망이 좋아 지리적으로 중요한 군사 요충지(要衝地)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이 신라영토의 중심지가 되면서, 왕이 순행하여 이궁대에 머물다 귀명리의 왕정(王井)에서 식수를 마시고, 근처 국농소(國農所)의 아름다운 연꽃을 바라보며 뱃놀이도 즐겼다고 한다.

지금의 이궁대는 무수한 잡목과 잡초로 우거져 있어 그 역사의 현장을 느껴보기조차 어렵다. 긴 세월에 묻혀버린 천년의 자취는 발아래 흐르는 강물과 함께 아무런 말이 없다. 하지만 이곳의 역사를 좀 더 고증·복원하여 아름다운 곡강과 함께 개발한다면 역사체험장과 관광지로 각광(脚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강변 팔문각 옆에 서 있는 회화나무 사이로 비치는 붉게 물든 강물의 아름다운 일몰(日沒)은 낙동강 제일의 해넘이 명소(名所)로 손색이 없다.

밀주지(密州誌, 박수헌, 1932)에는 1628년(인조 6) 밀양 부사로 부임한 정두원(鄭斗源)이 이궁대에 와서 지은 시(詩)가 소개되어 있다.

「성남성북야화개(城南城北野花開, 황성(荒城) 이쪽저쪽엔 들꽃이 피어 있고) 춘모처처만고대(春暮處處滿古臺, 옛 이궁대 곳곳엔 봄이 저무는데) 초적부지망국한(樵笛不知亡國恨, 초동(樵童)의 피리 소리는 망국의 한도 모른 채) 암비유향월중내(暗飛遺響月中來, 달빛에 은은하게 유향을 실려 보내온다.)」

K-헤리티지 뉴스 논설위원 장창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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