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목 전문기자
승인
2024.09.27 16:17
의견
0
『제기악기도감의궤』는 1624년(인조2) 1월에 일어난 이괄의 반란으로 없어진 제기와 제복 및 악기와 각종 의물 등을 제작하거나 보수한 것에 대한 기록이다.
제기악기도감은 말 그대로 제기와 악기를 설치하기 위한 임시 기구이다. 제기와 악기의 부족 사태가 빚어진 것은 반정 후 1년도 채 안 되어 일어난 이괄(李适)의 반란 때문이다.
당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봉해진 이괄은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추천으로 평안병사(平安兵使) 겸 부원수(副元帥)로 임명되어 관서(關西) 지방에 파견되어 있었다. 그런데 1624년(인조 2) 1월 17일에 난데없이 문회(文晦)와 허통(許通)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및 한명련韓明璉·기자헌奇自獻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는 바람에, 관련 인물들의 문초가 시작되었다. 이귀(李貴) 등이 이괄도 잡아다 문초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인조는‘충성스러운 이괄이 어찌 반심을 가졌겠느냐’며, 금부도사 등을 영변으로 보내, 이괄을 제외하고 그의 아들 이전(李旃) 및 기자헌 등을 서울로 붙잡아 오도록 하였다.
이괄은‘내 자식이 죽게 된 마당에 어찌 그 아비인들 무사하겠는가? 잡혀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 사내가 어찌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받겠는가?’라며, 아들을 압송하러 온 금부도사와 선전관 등을 죽이고 1월 24일에 한명련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2월 8일 반란군이 평안도와 황해도의 여러 지역 수비망을 뚫고 임진강까지 이르자, 그날 밤 임금은 도성을 떠나 공주로 피난길에 올랐고, 2월 10일엔 반란군이 서울에 입성했다.
그러나 2월 11일에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에게 반격을 당해 퇴각길에 올랐으며, 2월 15일에 이괄과 한명련이 부하 장수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도성이 점령된 초유의 반란은 평정되었지만, 궁궐이 불살라지고 사직·종묘·영녕전의 제기(祭器)와 의장(儀仗) 등의 물품을 도둑맞는 등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김종수 책임번역, 크라운변형판, 양장, 300쪽.
ICPS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