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이순신·육지의 사명당” ‘임진왜란 의병장’ 사명대사 친필 글씨, 일본서 돌아왔다

오대산 월정사 호국 애민, 사명대사를 통해 한류문화의 발자취 복원에 동기 부여

임인식 선임기자 승인 2024.10.08 13:34 | 최종 수정 2024.10.08 17:16 의견 0

조선시대 선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16~17세기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의병장과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이 일본에 갔을 당시 현지 승려에게 써서 줬던 친필 글씨 한점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강원 평창 월정사 성보박물관(관장 해운)은 ‘불심종조달마원각대사’(佛心宗祖達麼圓覺大師)란 한문을 쓴 사명대사의 친필 유묵(遺墨·생전에 쓰거나 그린 글씨·그림) 한점을 처음 내보인다고 지난 3일 밝혔다.

이 친필 글씨는 전란이 끝난 뒤인 1604~05년, 사명대사가 일본 도읍 교토에 강화 교섭을 위해 파견됐을 때 현지 승려에게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한 독지가가 최근 일본에서 입수해 절 쪽에 기증하면서 지난 5월 귀환이 이뤄졌다고 한다.

‘불심종조달마원각대사’(佛心宗祖達麼圓覺大師)란 큰 글씨가 쓰여진 사명대사의 친필 유묵. 글씨 윗부분에 이 유묵을 소장했던 일본 교토의 절 ‘대응사’(大應寺·다이오지)의 도장이 찍혀 있다.

유묵은 가로 30㎝, 세로 120㎝가량의 반 가리개 족자 병풍 정도 크기다. 종이폭 한가운데 큰 글씨로 선불교의 원조 달마대사에 대한 수사인 ‘불심종조달마원각대사’를 쓰고, 그 오른쪽에 글을 쓰게 된 경위를, 왼쪽 서명 낙관 부분에 자신의 지위와 이름을 적었다.

큰 글씨의 서두 부분인 ‘불심종’은 선종을 가리키며 ‘조’는 조사(祖師)를 가리킨다. ‘원각대사’는 당나라 대종이 달마대사에게 올린 추존시호(推尊諡號)를 뜻한다.

대사는 이어 큰 글씨를 쓴 경위 부분에 “만력 을사년(1605년) 봄에 널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남쪽 일본에 와 있을 때 해서글씨로 ‘불심종조달마원각대사’를 써 달라고 요구하기에, 사양할 수 없어 감히 쓴다”고 적었다.

왼쪽 서명 낙관 부분엔 ‘경산’(徑山·달마대사로 추정하나 불확실)의 37대손인 ‘사명사문’(泗溟沙門)이라고 자신의 지위를 소개했다. 해서와 행서로 쓰인 글자체들은 활달하면서도 거침없는 기세가 도드라져 선승의 자유롭고 힘찬 필치를 느낄 수 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려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고, 전란 뒤엔 사절로 일본에 가서 막부 실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어 조선인 포로 3천여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등 전란 수습에 기여했다. 월정사가 자리한 오대산에서 약 5년간 수행했고, 전란 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한 사고를 설치할 때 수행처 부근에 터를 정한 것으로 전해질 만큼 오대산과도 인연이 깊다. 글씨에 뛰어나 선승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와 더불어 불교계의 명필 ‘이난’(二難)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귀환한 사명대사의 유묵은 지난 4일부터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관객과 만나게 된다.

한편,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주지 정념스님) 부설 (사)화엄선연구소는 4일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사명송운 탄신 480주년 친필유묵 귀환기념 ‘오대산과 사명유정’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한국으로 돌아온 사명송운의 친필유묵을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로, 오대산과 사명대사의 관계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가 이뤄졌으며 이번 학술대회는 김풍기 강원대교수의 ‘시승에서 선승으로’ 발제를 비롯해 한상길 동국대교수, 월정사 만월선원 통현지인스님, 황인규 동국대교수 등의 연구논문 발표와 함께 논평, 종합토론 등으로 진행했다.

학술대회 관계자는 “사명대사는 오대산 사고(영감사)에서 약 5년간 주석하는 등 오대산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며 “그의 친필 유묵이 월정사로 돌아온 것은 사명송운과 월정사 관계의 의미심장한 계기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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