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통도사로 가는 길인 무풍한송로의 입구의 양쪽에는 석주 형태의 두 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 중 좌측에 있는 표석이 매우 흥미로운데, 표석의 전면에 산문금훈주(山門禁葷酒)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산문은 통도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어떠한 행위를 금지하기 위해 세운 금표로 보인다. 그 행위는 술을 마시는 것과 매운 채소[오신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임]를 먹는 행위를 금지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국내 다양한 금표의 사례와 비교하더라도 산문금훈주 표석의 사례는 형태나 내용 모두 기존과는 다른 특이한 경우에 속하는데, 이유가 있었다. 해당 표석이 세워진 시기는 후면의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선행자료에 따르면 ‘□□오년춘 세존응화이구사삼년 주지 구하 필(□□五年春 世尊應化二九四三年 住持 九河 筆)’로 확인된다. 명문 가운데 연대 부분은 훼손되어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표석에서 흔하게 관찰된다. 사라진 부분의 연호는 대정(大正) 5년으로 확인되기에 통도사 산문금훈주 표석은 1916년 주지인 구하 스님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산문금훈주 표석은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1962년 스즈키 사부로(鈴木三郎)가 발간한 「금패석탐구(禁牌石探求)」를 보면 일본 내 사찰과 사원 52곳의 금패석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 금패석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하마비를 비롯해 앞서 소개한 산문금훈주와 같은 형태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금패석은 사찰의 입구에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으로, 사찰 내 반입 혹은 행위를 금지하기 위해 세운 것이 특징이다.
일본의 경우 금표로서의 표지물 사례는 금령(禁令)을 새긴 목제 간판을 세운 형태가 있다고 한다. 다만, 재질상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은 사찰과 사원에 세워진 금패석이다. 이들 금패석은 석재 재질로, 일본 내 산문금훈주(山門禁葷酒)의 사례는 도쿄 시부야구(渋谷区)에 있는 서원사(瑞円寺)의 입구와 나고야에 있는 구국사(久國寺)의 입구에 세워진 산문금훈주(山門禁葷酒) 표석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산문금훈주의 사례는 일본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으며, 형태도 석주 형태와 자연 바위 등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또한, 명문은 틀리나 의미는 동일한 금패석들도 다수 확인되는데, 대표적으로 교토 황벽산(黄檗山) 만복사(萬福寺)에 세워진 불허훈주입산문(不許薰酒入山門) 표석을 비롯해 일본 내 사찰과 사원에서 확인되는 금훈주산문(禁葷酒山門), 금훈주(禁葷酒), 불허훈신주육입산문(不許葷辛酒肉入山門)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사례의 비교 분석을 통해 양산 통도사에 있는 산문금훈주(山門禁葷酒) 표석은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시사한다. 또한, 화성 용주사(龍珠寺)에도 형태는 다르지만 삼문의 양쪽 끝에 금연(禁煙)과 금주(禁酒)를 새긴 표석이 있다. 다만, 다른 명문이 없기에 해당 표석이 언제, 누가 세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산문금훈주 표석과 일본 내 금패석의 사례를 고려해보면 용주사 금연(禁煙)·금주(禁酒) 표석 역시 일제강점기 혹은 그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처럼 통도사 산문금훈주 표석에서 시작된 의문은 일본 내 사찰과 사원에 세워진 금패석을 통해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해당 표석의 경우 일본의 영향을 받아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기존 금표와 유형, 형태, 성격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름 없는 표석 하나에도 역사성과 상징성이 담겨 있기 마련으로, 우리가 관심을 가진 만큼 문화유산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아는 사람에게 돌도 달리 보이는 법이다.
ICPS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