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림간(兩林間) 마을의 내력

운례수(運禮藪) 이야기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5.01.02 07:14 | 최종 수정 2025.01.03 10:36 의견 20

밀양시 상남면 예림리에 양림간(兩林間)이란 마을이 있다. 학창 시절부터 이삼십여 년간을 쭉 ‘밀양강을 사이에 두고 상남면의 운례‧예림과 삼랑진읍의 임천‧숭진의 양쪽에 산(숲)이 있는 마을이니 양림간이라 했나’라며 짐작하였다.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밀양문화원, 1994년)에는 다음과 같이 양림간 마을의 운례수(運禮藪)를 소개하고 있다.

「을자형(乙字形)으로 굽이돌아 흘러온 응천강(凝川江, 밀양강) 물이 운례 마을 앞에 이르러 정체(停滯)되지 않고 그 운세대로 직류(直流) 하는 곳이라 하여 운류(運流)가 운례(運禮)로 표기되었다는 밀주지(密州誌, 박수현, 1932년)의 기록이 있다. 그래서 마을 동쪽 강변에 침수를 막기 위해 탱자와 가시나무를 심어 전답(田畓)을 보호했는데 그것이 유명한 운례수(運禮藪)를 이루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출사(出仕)하기 전의 젊은 시절에 지은 운례야(運禮野, 운례 들판에서)라는 시(詩)가 있다.

「너른 들판은 이미 가을빛이 완연하여 추수하느라 점점 바빠지는데, 가시 연(蓮) 꽃봉오리는 기러기 머리처럼 솟았고, 벼 포기는 쑥부쟁이처럼 드문드문 남았구나. 무성한 숲에는 모기가 비 내리는 듯하고, 언덕 저편의 강물은 구름 같은데, 해 저물어 소와 양을 몰고 돌아오니 동네 연기가 느릅나무를 감싸고 있구나.」

이 시(詩)에서 보면 이미 운례 숲은 존재하였으며, 큰물이 들면 멀리 금동역(지금의 외금마을)까지 물에 잠겼음을 알 수 있다. 가을 추수가 가까워지는데도 물이 빠지지 않아 금동역 아래까지 침수되었다는 내용이다.

양림간 마을 전경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조선조 성종의 명에 따라 노사신 등이 조선 각 도의 지리, 풍속 등을 적은 지리지)에는 운례수가 밀양부의 남쪽 6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향토 지리지 밀주지(密州誌)에도 운례수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와 있다.

「운례수(運禮藪)는 율림(栗林, 밤섬, 삼문동)의 남쪽에 있다. 응천(凝川)의 입구가 막히지 않고 똑바로 동남으로 흘러 운례촌(運禮村) 앞의 넓은 밭을 쳐 무너뜨리므로 옛사람들이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어 물이 넘치더라도 길게 걸쳐진 흙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방지(防止)하였다. 따로 나무를 베거나 짐승을 방목하지 못하도록 하여 숲이 울창하도록 감고(監考, 조선 시대 국가에서 특수 용도로 관리하는 산림, 내, 못 등을 감독하는 사람)가 관리하여 주민들이 감히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운례수(運禮藪)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황폐되고 이로 인해 연간 일만여 석의 소출을 가져왔던 전답이 못쓰게 되었다. 그러자 운례촌 주민인 박세길(朴世吉), 류성로(柳聖魯), 안언형(安彦衡) 등이 운례수 복구를 관아(官衙)에 호소하여 밀양부에서 이직신(李稷臣)이 경상도 관찰사에게 그 사정을 적어 상신(上申)한 끝에 그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홍재철(洪在喆, 1799〜1870)의 배려로 운례수를 복구하게 되었다.」

위와 같은 사실은 밀양복수지(密陽復藪誌, 이직신, 1841년경 발행)에도 나와 있다. 축소 복원된 밀양 관아 앞에는 홍재철(1840.9〜1842.4 재임)의 복수선정비(復藪善政碑)가 있는데 이 비는 1841년(헌종 7) 9월에 세워졌다. 비문의 내용은 「밀양에 있는 숲은 오로지 비보(裨補, 도와서 모자란 것을 채움)를 위한 것인데 앞서 운례수(運禮藪)가 황폐되었다가 공(公)이 다시 만들었다. 향후 이곳의 나무를 자르거나 베지 못하도록 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며 오로지 그곳에 나무를 심어 다시는 숲을 바꾸지 못하도록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홍재철의 복수선정비

이러한 운례촌(運禮村, 예림〜양림간)에 오늘날과 같은 제방(堤防)이 만들어진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이와 관련된 1927년 8월 30일 자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記事)가 실려 있다.

「상남면의 평야는 길이가 30리에 달하는 낙동강과 밀양강의 충적지(沖積地, 물에 의해 운반된 모래나 흙 따위가 쌓여 이루어진 땅)로 땅이 비옥(肥沃)하여 농경지로 가장 적절함에도 오래전부터 수리(水利) 관개(灌漑)시설이 없어 황막한 미개간지로 방임(放任)되고 극히 일부만이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이 옥토에 관개시설을 하면 양전(良田, 기름진 밭)이 되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될 것이다.」

예림제방(자전거 길)

일본 강산현(岡山縣) 출신의 마쓰시타 데이지로(松下定次朗, 송하정차랑)가 자비를 들여 1904년부터 1907년에 걸쳐 밀양강 중류에 용두보(龍頭洑)를 설치하고 약 400여m의 용두산 아래에 물길 터널을 뚫었으며, 이어 1909년 11월부터 1910년 6월에 걸쳐 당시 돈 30,000원을 들여 예림의 제방을 쌓았다. 이로 인하여 약 750여 정보의 관개(灌漑) 농지가 생겨났다. 그리하여 상남(예림) 들판은 밀양의 대표적 곡창지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이곳 넓은 들판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량 수탈의 전진기지가 되는 큰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지금의 예림 제방은 잘 포장되어 자전거 도로로 활용되고 있으며, 넓은 상남(예림) 들판은 편리한 교통과 농업용수의 원활한 공급으로 쌀 생산은 물론이고, 시설재배의 최적지(最適地)로 딸기, 수박, 토마토 등을 생산하여 농가의 수익을 증대시키고 있다.

상남들(예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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