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은 예(禮)의 고장이다. 밀양을 대표하는 선비로 사림의 영수(領袖)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82) 선생을 배향(配享)하는 예림서원에는 예가 숲을 이루고, 예림, 오례, 명례, 고례, 예촌, 발례, 시례, 모례, 가례 등 여러 마을 이름에도 예를 새기며 살아왔다. 그만큼 밀양의 선조들은 예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생활화하였다. 왜 다른 지역 사람들이 밀양을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일컫는 말)’이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그 해답이 바로 예에서 찾을 수 있다.
예(禮)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기에 개인이나 가문에서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무엇보다 오래전부터 국가 차원에서 예에 관한 법령을 제정하여 아주 엄격하고 소중하게 취급하였다. 예컨대, 종묘(宗廟)와 사직단(社稷壇)을 마련하여 나라의 근간(根幹, 사물의 바탕이나 중심이 되는 것)과 국정의 통치 철학을 굳건히 하였으며, 성균관(成均館)과 향교(鄕校)를 설립하여 예로서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敎化)하였다.
그중에 사직단은 토지의 신(神)과 오곡(五穀, 쌀·보리·콩·조·기장)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사직(社稷)은 종묘(宗廟, 조선 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으로 대묘(大廟). 태묘(太廟)라고도 함)와 함께 나라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 농업국가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국가 시설이었다. 즉, 토지의 신(神)인 사(社)와 곡식의 신(神)인 직(稷)에 제사를 올려 풍년을 기원하던 곳이다. 그래서 한양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서도 사직단을 설치해 고을의 수령(守令)이 매년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祭祀)를 지냈다.
일반적으로 사직단은 2층으로 단(壇)을 만들어 위에는 오색 흙을 덮었으며, 북사남직(北社南禝)으로 설치하여 매년 관(官)에서 제사를 주관하였다. 조선 후기에 발행된 밀양지(密陽志, 신익전, 1652년)에는 신라 시대인 783년(선덕왕 4)에 처음으로 사직단을 세웠고, 고려 성종 때 제도화했으며, 그러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사직단이 폐쇄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북면 오례리 전경
밀양 사직단은 처음에는 종남산 아래에 있었으나 1580년(선조 13)에 밀양 부사로 재직하고 있던 하진보(河晉寶, 1530〜1585)가 밀양부 서쪽으로 옮겼다. 밀주승람(密州勝覽, 1927년 겸수 손병현(孫柄鉉)이 지은 밀양의 근대지리지)에는 하진보가 “연로혐어승강(年老嫌於昇降, 나이가 들어 오르내리기를 싫어함)” 하여 종남산에 있던 사직단을 부북면 오례리로 옮겼고, 추화산에 있던 성황사를 성동문(城東門) 안으로 옮겼으며, 신원(新院, 신안마을)에 있던 여제단(厲祭壇, 나라의 길흉사와 관련된 제사를 지내는 곳)을 구대곡촌(仇代谷村) 서쪽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부북면 오례리 일대에 사직단이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구체적인 위치는 알지 못하였다. 오례리 주민들의 전언(傳言)에 의하면 오례리 앞산에 사직단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 명칭을 ‘사진단’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2019년 김해국립박물관에서 특별전 「밀양」을 준비하면서 오례리의 앞산 능선(稜線)에서 밀양 사직단을 처음으로 확인하였는데, 사직단으로 추정(推定)되는 능선 주변에서는 각종 기와 조각이 수습(收拾)되었다. 이곳은 1899년(고종 36) 편찬된 밀양군읍지(密陽郡邑誌)에 수록된 밀양 지도의 사직단과도 위치가 일치한다. 이 책은 전국 읍지(邑誌) 관련 사업의 일환으로 편찬되었는데, 당시 밀양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으며, 밀양의 고지도(古地圖) 가운데 유일하게 사직단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밀양 사직단에 표시된 밀양군읍지 지도(1899년)
하진보(河晉寶)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오랫동안 대간(臺諫)으로 활동하였다. 1580년(선조 13) 밀양 부사로 재직할 때 종남산에 있던 사직단을 지금의 부북면 오례리 앞산으로 옮겼다.
밀양 사직단에서 수습(收拾)된 기와는 고려 후기인 13세기에서 조선 후기인 17세기까지 시대의 폭이 넓다. 이로 보아 현재 자리에 사직단이 들어서기 이전인 고려 시대에 이미 다른 건물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16세기에 사직단이 들어서면서 집선(集線) 무늬 계열의 기와가 사용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사직단 기와를 교체할 때 청해파(靑海波) 무늬 기와가 올라갔다.
지금까지 밀양시에서조차 사직단에 관한 안내나 설명이 전무(全無)한 상태였기에 극히 일부의 관심 있는 향토사학자들조차 자료를 공유(共有)할 수 없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밀양 사직단이 있었던 오례리 마을 앞에 사직단에 관한 안내판과 함께 사직단이 있었던 능선(稜線)에 위치 표지석을 만들고, 밀양시청‧밀양시립박물관 홈페이지에 밀양 사직단에 관한 내용을 간단히 안내‧설명하는 글을 게시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