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깅(Plogging)은 조깅, 산책 등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활동을 일컫는 용어이다. 2016년 스웨덴의 에리크 알스트룀(Erik Ahlström)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스웨덴어 플로카 우프(Plogka Upp, 줍다)와 영어 조깅(Jogging, 천천히 뛰다)의 합성어에서 유래됐다. 즉, 길거리나 자연, 문화유산이 있는 곳에서 조깅, 산책, 자전거 타기 등을 하는 동안에 쓰레기를 주우며 건강과 함께 자연보호나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종의 환경보호 운동이다.
부북면 오례리 전경
2024년 밀양시 소재(所在)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하는 밀양 최초의 플로깅 장소로 문중과의 협의를 거쳐 부북면 오례리에 있는 의첨재(依瞻齋)로 정하였다. 문화유산을 사랑하고 답사(踏査)를 좋아하는 20여 명의 시민이 모여 월 1회씩(4월~11월) 청소, 잡초 제거, 정원수 관리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들이 끝난 후에는 의첨재를 비롯하여 인근에 있는 문화유산 2~3곳을 답사하며 해설사의 간략한 설명을 듣는데, 참여자들의 관심도(關心度)가 매우 높다.
밀양시 부북면 오례리에 있는 의첨재(依瞻齋,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는 함평이씨 묘하제숙소(墓下齊宿所,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이곳의 주인공 이선지(李先智, 1576~1624)는 본관이 함평(咸平), 자는 명원(明遠)으로 1576년(선조 9) 통덕랑(通德郞, 품계만 있는 정5품) 이지경(李止敬, 1554~1576)의 아들로 태어나자마자 부친을 잃고 이듬해 모친 아산장씨(牙山蔣氏)를 따라 외가가 있는 제동(堤洞, 부북면 제대리 지동)으로 내려와 살게 된 함평이씨 밀양입향조(密陽入鄕祖)이다.
의첨재 전경
공(公)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설움이 간절하여 홀어머니 섬김에 그 효성이 극진(劇震)했다. 자라면서 집안의 명예를 이룰 큰 뜻을 품고 무예를 닦아 1603년(선조 26)에 무과에 급제한 후, 1610년(광해군 2) 어모장군선전관(禦侮將軍宣傳官), 1611년 도총부경력(都總府經歷), 1614년(광해군 6)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讓衛副護軍)을 거쳐 중추부사첨지통정대부(中樞府事僉知通政大夫, 당상관)에 올랐다.
이후 서궁의 변(西宮의 變,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덕수궁에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죽인 사건)으로 정국(政局)이 혼란해지자 큰아버지 판서공 이지효(李止孝, 1551~1614)는 상소를 올려 항직(伉直)하다 간신들의 모함으로 옥에 갇혀 7일 만에 피를 토하며 분사(憤死)했다. 이에 공은 이날의 충분(忠憤)을 금하지 못하고 “국모가 없는 나라의 녹(祿)을 먹느니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리라”라고 결연히 다짐하며 선비의 명분과 도리를 다하기 위해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落鄕)하였다.
이후에 조정에서 공의 충의를 기용(起用)하기 위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지극한 효성으로 모친을 받들고 생활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이 이러한 공의 충효를 경모(景慕, 마음속으로 우러러 사모함)하여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오산(鼇山)‧월례(月禮)에서 오례(五禮)로 고쳐서 불렀다고 한다.
모친이 별세하자 오례리 조룡산(照龍山)에 안장(安葬)하고, 묘소 아래 의막(依幕, 부모의 상중에 임시로 거처하는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그 이후로 이곳이 함평이씨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집터만 남아 있던 것을 숙종 연간(1674~1720)에 후손들이 제실(齊室)로 중창(重創)하였고 그 후 수차례에 걸쳐 건물을 수축(修築)해 오다가 1897년(광무 원년, 고종 34)에 종손 이만헌(李萬憲)이 종중의 의견을 모아 현재와 같이 중수(重修)하고는 의첨재라 편액(扁額)하였다.
의첨재 현판
정당(正堂)의 대청에 ‘의첨재(依瞻齋)’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의첨(依瞻)은 ‘묘 아래서 어머니를 의지하고 호남(나주) 땅에 안치된 아버지를 바라본다’라는 뜻이다. 의첨재는 높은 축대 위에 세워진 6칸의 맞배지붕으로 가운데 2칸의 마루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방을 설치(設置)하였는데 왼편이 1칸, 오른편이 2칸이다. 정당의 뒤편에는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어 제사를 지낼 때 거처하는 곳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곳은 본래 공이 살던 정침(正寢) 터로 추측되며 여기서 소실(消失)됐던 주춧돌이 발견되어 지금의 건물로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의첨재기(依瞻齋記, 1925년)는 안동인 동강 김영한(金寧漢, 1878~1950)이 썼는데, 공의 부모를 향한 효성과 선비로서의 결의와 도리, 후손들의 선조(先祖)에 대한 공경과 생활 방식이 잘 기술(記述)되어 있다.
대문채 기둥 글씨
정당 맞은편 입구의 대문채는 고자사(庫子舍)를 겸용하는 건물로 좌우에 행랑방과 부엌이 각각 붙어 있으며, 가운데에 우뚝 솟은 삼문(三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의첨재로 들어가는 대문 기둥에는 ‘생사사생(生事事生), 성사사성(省事事省)’이라는 예서체(隷書體) 글귀가 걸려 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의 존심편(存心篇)에 나오는 글로 ‘일을 만들면 일이 생기고, 일을 덜면 일이 없어진다.’라는 뜻이다.
의첨재에서 첫발을 내닫은 밀양의 문화유산 대상 플로깅은 유적지에서 단순히 쓰레기를 줍는 등의 환경보호 활동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채 산재(散在)되어 있는 지역의 문화유산을 아끼고 보호하는데 역점(力點)을 두고 활동해야겠다는 의견을 모은 것이 큰 성과이자 의의(意義)라 할 수 있다. 2025년에는 유적지 한두 곳을 더 선정하여 지역민들의 자발적인 호응(呼應)과 동참에 의한 시민운동으로 점차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