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강 하류의 역사적 환경
(1) 삼국시대 전기(방어체제의 1단계)
전곡리유적 등 구석기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어 일찍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음을 알려준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지들이 발견되어 한강 하류가 집단 취락지구였음을 알려준다. 渼沙里․岩寺洞 유적 등은 토기의 발견으로 유명하다.
벼농사 문제도 있다. 최근에는 김포․고양․일산 등지에서도 벼농사의 유적들이 발견된다. 현재도 고양․파주․김포․강화 등 한강 하류지역은 대표적인 벼농사 지역이다. 대동강유역․한강유역 등 서해안지역에는 특히 청동기문화의 흔적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그대로 역사시대로 이어졌으며, 역사적 위치와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경기만이 본격적인 역사의 중심부로 등장하고, 한강 하류를 중심으로 한 방어체제가 성립된 것을 역사적 상황과 관련시켜 보면 몇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辰國과 三韓에 소속되어 있던 小國들의 시대를 거쳐 백제가 경기만을 처음으로 장악한 삼국 전기에 해당한다. 각각의 소국들은 주로 해안가나 큰 강의 하류에서 발생하고 성장하였다. 또한 각 소국들간에는 물론 바다를 건너 외국과도 교역하는데 유리했다.
소국들은 필연적으로 해양문화가 발달했고, 교역을 통해서 성장한 海岸 都市國家(polise) 혹은 河岸都市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초기에 만들어진 도시나 성들은 물가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의 성이다.
방어체제와 관련하여 한강 하류에 본격적인 비중을 둔 것은 백제부터였다. 백제는 경기만의 한강수계를 중심으로 한 서부해안에서 건국된 지정학적 조건과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출발부터 해양 및 한강 하류와 깊은 관련이 있다.
(2) 삼국시대 중기 (방어체제의 2단계)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각 국간에 정치․군사적인 대결이 심각해짐에 따라 방어체제도 점차 체계적이 되었다. 성의 규모도 커지고 방어시스템도 조직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선박의 크기가 커지고 성능이 우수해짐에 따라 상륙지점 혹은 공격지역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한강 하류 및 해안가의 성은 방어체제 뿐만 아니라 자국의 외교사절․교역선단 등을 보호하고 해양 진출을 위한 橋頭堡 내지 진출거점이라는 본격적인 기능도 하였다. 4세기에 들어오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팽팽한 대결로 한반도의 역학관계에도 변화가 발생하였다. 고구려는 낙랑(313)과 대방(314)을 멸망시켰고 이어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취하였다. 한편 백제는 한반도 내부의 토착세력들을 정복 병합하고, 한편으로는 樂浪․帶方 등 중국의 주변세력과 직접적으로 대항하면서 성장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의 거점을 확보하면서 한강수계와 서해중부 해안이 가진 경제․외교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결국 고구려의 남진과 백제의 북진은 한강 하류지역과 경기만에서 충돌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경기만과 한강 하류지역을 놓고 갈등을 벌일 때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올랐고, 그로 인하여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질적인 변신을 했다. 대왕은 첫 해부터 동서남북으로 전방위 정복활동을 추진하였다. 백제 공격은 즉위년부터 대왕 17년(407)의 정벌 때까지 계속되면서 예성강 및 한강유역의 백제 활동영역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그 후 장수왕이 왕위에 오르며 475년에는 대군을 동원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한강변의 방어체제를 공격하면서 도하하거나 직공해 들어왔을 것이다. 특히 수도인 한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강을 도하하여야 했다. 경기만과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점령지역을 다스리는 행정의 治所로서 적을 방어하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성들을 곳곳에 구축하였다.
대체적으로 군사적인 요충지는 지정학적인 요인에 가장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점령군이 바뀌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때문에 고구려는 종래 백제나 신라가 만든 성을 기본적으로 그대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다만 고구려의 축성은 장소의 선정이나 축성술이 백제나 신라와 달랐을 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 뛰어났으므로 새롭게 쌓은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하안 및 해양방어체제는 4세기 중반에서 5세기에 걸치는 이 2단계에 가장 많이 구축되었고, 또 효용성이 컸을 것이다.
(3) 삼국시대 후기(방어체제의 3단계)
삼국시대는 후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와 백제 외에 신라가 가세하여 본격적인 삼국의 쟁패전이 벌어졌다. 주된 전장은 내륙으로 옮겨갔고, 대규모의 군사와 기마병이 동원되는 양상으로 바뀌면서 한강 강변방어체제는 상대적으로 의미가 약화되었다.
『삼국사기』권37 지리지에는 일산의 고봉산과 관련하여 고구려가 이 지역을 점령한 기사를 싣고 있다. 達乙省縣은 韓氏 미녀가 높은 산정에 올라 봉화를 켜서 安臧王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고봉산성은 강변방어체제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상호 관련을 맺으면서 유기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략지역이다. 그러나 백제는 성왕 29년(551)에 2차 나제동맹을 체결시켜 한강 하류유역을 수복하였다. 하지만 신라의 배신으로 2년 후인 553년에 신라의 진흥왕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7세기에 들어서서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면서 한강 유역은 다시 전장이 되었다. 제1차․2차 나제동맹 등 한강 점유를 둘러싸고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각축전을 벌이면서 경기만의 해양방어체제는 다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후에 신라와 당나라간의 전쟁이 벌어질 때도 해상전투가 활발했다. 이는 신라의 수군함대가 경기만의 어느 지역에 있었으며, 한강 하류와 직접 혹은 간접으로 관련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673년에 임진강의 瓠瀘河 전투와 한강의 王逢河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를 거둔 사실은 강변방어체제의 역할에 대하여 강한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이후에도 한강에는 강변방어체제가 구축되고, 군사․경제적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기본토대가 구축되고 역사적으로 제 역할을 분명하게 한 것은 삼국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