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루가(敦賀)에서 만난 왜, 가야, 신라,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역사와 문화들

윤명철

쓰루가 지역에 들어선다.

산 속 길을 계속 달리는 듯 하더니 바다가 나타났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물들이 출렁거린다. 동해의 물들이다. 강원도의 양양, 경상도의 울진, 그리고 포항에서 보던 그 강하고 파란색 물들이다. 항구로 가서 정박한 흰색의 고깃배들을 두루 두루 만나고, 파도치는 부둣가를 천천히 거닌다. 낡지만 정갈한 판자집들 사이로 아직도 찬 겨울바람들이 몰려 다닌다. 산 기슭의 삼나무들에 다닥다닥 묻어있는 눈가루까지 날려온다. 어쩌다 마주친 사람들도 관광객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듯 하다. 다사다난한 역사가 담겨있는 외국에 온 느낌이 제대로 든다.

물가에 바짝 붙은 채로 있는 낡지만 조촐한 식당에서 가서 주문을 한다. 군데 군데 닳은 다다미에 앉으니 눈 길이 절로 바닷물에 닿는다. 일본인 같지않은 무뚝뚝한 태도를 보이는 아저씨와 친절하지만 역시 여느 일본 아줌마들과는 다른 할머니가 운영하는 듯 하다. 상을 차려 내오는데 싱싱한 회들이 흰 쌀밥과 함께 반찬처럼 자리잡고 있다. 맛도 맛이지만 별식이 아닌 듯 마치 백반같은 분위기라 마음 편하게 점심을 달게 해치웠다. 시골스러움, 어촌스러움이 버부려진 정경이다.

쓰루가(敦賀)는 일본의 혼슈지방에서 중간보다는 조금 남쪽인 후꾸이(福井)현의 중소 도시이다. 위로는 이시가와현, 니이가타현 등이 있고, 남으로는 돗토리현, 시마넨현 등이 있고, 동쪽으로는 비파호를 거쳐 나라아스까 교토 오사카가 있는 키나이지방과 연결된다. 쓰루가는 동해 쪽에 있는 몇 개 안되는 큰 만 가운데 하나이다.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이기 때문에 복잡하고 많은 작은 만들이 둘쭉 날쭉 몰려있는 와카사만(若狹灣)의 한 부분이다. 와카사만은 북위 35.5도로서 신라인들이 진출하여 정착한 이즈모(出雲)와 위도가 똑같고, 경남 울산이나 포항과 가까우며 강원도의 동해나 삼척 등과도 아주 가까운 곳이다.

이 지역의 해안가를 출발하면 해류를 타고, 또 늦가을에서 겨울철에 부는 북서계절풍을 이용하면 일본열도의 시마네(島根)현, 돗도리(鳥取)현, 후꾸이(福井)현으로 자연스레 도착한다. 심지어는 동해북부나 현재 연해주의 남쪽 해안에서 출항하여도 이 지역에 닿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한반도의 동해안을 타고 남하하는 리만해류는 대마도 근처에서 쿠로시오의 한 갈래인 대한난류와 합류한다. 이어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즈모 돗토리 쓰루가가 있는 산인(山陰) 지역이나 이시가와현이 있는 호쿠리쿠(북륙) 연안을 따라 북상한다. 과거에는 표류병들이 도착하는 상태를 통계내서 이러한 현상을 입증했는데, 지금은 해양물리학에서 과학적인 측정 데이터를 활용해서 입증한다. 거기다가 내 이론에 따르면 이즈모 돗토리 등에 도착한 세력들도 연안항해를 따라 수평으로 이동하면 쓰루가 해안에 쉽게 도착한다.

그리고 여기서 출발하여 20여 km를 가면 나타나는 비와호(琵琶湖)를 북쪽으로 끼고 돌면 단거리로 고대 일본의 중심 지역인 카나이 지역(오사카 나라 아스카 교토 등)으로 접근할 수 있다. 불과 100km 정도라고 한다. 큐슈에 도착해서 세또내해를 지나 오사카의 외항에 도착한 후에 아스까나 나라로 들어오는 것보다 용이하다. 재일동포 역사학자인 김달수 선생과 일본인들은 말한다. ‘와카사’는 한국말 ‘住き來(ワカン)’, 즉 ‘왔소’가 변하여 ‘와카사’라 변하여 됐다고 한다. 쓰루가 옆의 동네인 ‘오니후(遠敷)’는 한국말 ‘ゥオンフ’에서 온 것이라 하며, 지명인 ‘네고리(根來)’는 한국어의 ‘네 고리’ 즉 ‘汝の古里’에서 온 말이 아니냐고 방문했던 신궁사(神宮寺)의 스님이 열을 내며 내게 반문했었다. 사실 이 절의 안내서에도 그렇게 써있었다.

그러니 아주 아주 먼 옛날, 적어도 야요이 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온 주민들이 도착할 만한 곳이다. 오하마 마을(고풍정)의 小和田 주변에는 20여기의 고분들이 산재해 있고, 돌칼이나 돌창 등 야요이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후에 가야인들, 신라인들, 고구려인들이 시간을 달리하면서 상륙했다. 마지막에는, 9세기 무렵부터 발해인들이 망망 대해인 동해를 건너와 상륙했고, 다시 고국으로 떠날 때 머무르는 곳이었다.

나 또한 40여년 전, 그러니까 1982년도에 이 곳에 온 적이 있었다. 대학원생인 1982년도에 나는 대한해협에 ‘해모수’라는 이름의 뗏목을 띄웠었다. 선사시대부터 한민족이 일본열도에 진출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항로를 추적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너무나 당연한 일로 알고 있지만, 그 무렵에는 학계나 일반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기억에는 최소한 1990년대 초까지는 한민족의 일본열도 진출, 일본 속의 한국고대 문화가 많거나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 몰랐고, 학계도 그런 주장과 행위 즉 조사와 답사를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으로 보았었다.

그때 뗏목을 타고 항해하다가 폭풍을 만나 문제가 생기면서 실패를 하고, 중간에 지나가는 화불선에 구조되면서 뗏목은 거대한 파도 속에 그대로 놔두었다. 그런데 해모수는 주인이 없는데도 저홀로 잘 떠내려가 9일 만에 혼슈 남쪽인 하기시의 앞바다인 미시마(견도)에 표착했다. 나는 그 뗏목을 찾기위하여 12월 초에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때 나를 안내해준 사람이 그 무렵 교토산업대학의 탐험부 출신인 야마구치 기요다카였다. 그의 집이 바로 쓰루가였으므로 난 여기저기 다니다가 들어보지도 못한 이 쓰루가에 왔다.

야마구치의 집에 몇일 동안 머무르면서 친구들과 여러 지역을 조사다녔고, 이 지역이 우리와 연관이 얼마나 깊은 가를 현장에서 확인했다. 이 때문에 훗날 공부를 하고 책과 논문들을 발표하면서 쓰루가 지역이 얼마나 우리와 연관이 깊었고, 특히나 나의 전공인 고구려인들, 뒤이어 발해인들이 도착하고, 활동했던 역사의 고장임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자주, 한 50여 번쯤 일본에 조사와 답사를 나왔지만 쓰루가 지역을 살짝 살짝 비켜 나갔다. 연구도 연구지만, 그 착하고 고마운 야마구치의 소식을 듣기위해서라도 다시 쓰루가를 방문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쓰루가는 고대 에치(越)지방의 한 지역이다. 8세기경부터 군(郡)의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나 원래의 이름은 ‘쯔누가’, 즉 ‘角鹿’이라 한다. 옛날 뿔 달린 사람이 이 해안에 닿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수인천황 2년조)>에 따르면 ‘쯔누가 아라시와’라고 하는 가라왕(加羅王)의 아들인 都怒我阿羅斯等이 穴門(현재 시모노세끼 부근)에 닿았다가 바다를 타고 올라와 이 곳에 닿았다고 한다. 아마도 투구를 쓰고 진출한 가야계 집단의 이주를 나타낸 설화가 아닌가라는 주장들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진구우(神功)황후의 남편인 쥬아이(仲哀)천황, 오진(應神) 천황이 어릴 때 방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역사에 관심있는 많은 이들이 이 쓰루가를 주목하고, 심지어는 고대 ‘야마다이국’이 이 곳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쓰루가에는 신라를 나타나는 단어인 시라기(シラギ)라는 명칭을 지닌 신사 이름, 토지 이름들이 몇 개나 있다. 그 중의 하나인 시라기(白石) 신사는 애당초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서 영구(靈龜) 원년(715년)에 옮겨간 若狹彦 신사의 뿌리가 되는데 이 골짜기에 있다. 또 하나는 神露貴彦(しろきひこ) 신사, 白城(しらき)신사・白鬚(しらき) 신사 등이 있는데, 역시 신라계를 주신으로 모시고 있다. 하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바닷가에 있는 것은 시라기(白木)신사이다. 소풍만의 시라기 마을(白木村)에 있는데, 新羅祖神을 모시고 있다. 백목은 원래 ‘신라’로 썼다가 중세에 이르러 백목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유명한 학자인 미즈노 유(水野 祐)는 『일본 신화를 재검토하다』에서 신라를 ‘白’으로 표현한 것은 오행사상에서 서방이 백색이기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야마나카 료타(山中襄太)는 『지명어원 사전』에서 「백목」은 「新羅來」라는 뜻이라고 했다. 하시모토 쇼조(橋本昭三)의 『白木の星』에 따르면 남북조 시대에는 시라기의 지명이 「白鬼」로 되었다고 한다. 사실은 이마조(今庄) 마을에도 '백귀(白鬼)'라는 지명이 몇 개 있었다. 결국 이 지역에는 신라와 연관된 문화가 퍼져있었던 것이다. 사실 일본에는 이 ‘백(白)’ 자(字)가 들어가는 지명이 아주 많은 데다가 특히 신라를 가리키는 시라기로 발음되는 지명과 신사가 많다.

1982년 겨울에 왔을 때 시라기(백목)신사가 있는 이 곳은 항구와 해수욕장이 있었던 한적한 어촌이었다. 한 겨울날 쓸쓸해보이기 까지 하는 신라신사에 가니 하양 화강암으로 만든 도리이(鳥居)가 서있고, 양 쪽에 ‘고마이누(狛犬)’가 사람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민간인들이 정부 몰래 밀항한 경우들도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신라인들이 들어왔을까. 그 옛날 이 해안에 도착한 신라인들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하는 나의 등 뒤로 무지개가 파도가루들 위로 번지고 있었다. 그 순간 운명을 떠올렸고, 몇 군데 신라신사들을 보면서 우리 역사의 한 비밀스러운 커텐을 열어야 한다는 마음을 더욱 다잡았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 약속을 지켜서 한일고대사의 여러 부분들을 밝혀내고 새로은 시각들을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