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루가(敦賀)에서 만난 왜, 가야, 신라,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역사와 문화

쓰루가는 이렇게 한 일 고대사에서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유적과 유물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게히(氣比)신궁이다.

좀 떨어져 세운 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간다.

아. 얼마 만인가?

가슴이 뛰기도 하고 착찹하기도 하다.

야마구치와 일찍 떠난 한국 부인인 기선씨, 무까에 등과 밤에 놀러온 기억들이 떠오른다.

역시 꽤 알려진 신궁답게 입구부터 꽤 크고, 도리이가 엄청나서 함께온 이들의 마음을 압도한다. 그런데 조금은 쓸쓸함이 느껴진다. 너 댓명의 사람들이 오고가고, 여행객인 듯한 젊은 남녀가 특유의 걸음거리와 표정으로 내 앞을 지나친다. 먼 길을 돌아돌아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반색하면서 달려나오기는 커녕 눈에 띄지도 않으니 말이다. 평일인데다가 눈발이 날리는 추운 날씨라서 그런 모양이라고 위안해 본다.

게히 신궁은 신공황후를 비롯해 일본신화의 천황들과 연결된 중요한 신들을 모시고 있다. 82년도에 왔을 때는 한겨울에 눈덮힌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하양헤 입김을 뿜어대며 얼어나가다가 문 앞 조그만 공터에서 이 동상을 보았다. 당당한 체구와 강렬한 인상에 놀라면서 야마구치에게 특별히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놀랍게도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라는 가야계신을 형상화시킨 것이란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의부가라국에서 건너온 왕자였고, 이마에 뿔이 난 그는 5년 동안 이 지역을 다스렸다고 한다. 쓰루가의 어원이 이 ‘카즈카’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그때는 한일관계사를 잘은 몰랐던 터라 떨림으로 다가왔다. 김해와 가까운 큐슈가 아닌 혼슈, 그것도 한참이나 북상한 중부지역에서 가야와 연관된 역사, 그것도 현재까지 사람들의 인식 속에 남아있다니.

여기에는 우리와 연관이 깊은 또 하나의 전승이 있다. 어쩌면 일본 고대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인 오진(응신)천황일지도 모르는 신라계 진출자인 신라왕자 천일창(천일모)와 연관된 이야기이다. 712년에 망 백제계 유민세력인 ‘안만려’ 등에 의해 집필된 최초의 역사서 겸 신화서인 <고사기>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 신라의 왕자인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가 일본에 건너온 내용이다. 아구(阿具)라고 하는 연못 옆에서 한 여자가 낮잠을 자는데 햇빛이 비추고, 그녀는 임신을 했고, 붉은 옥을 낳았다. 이것을 본 한 남자가 붉은 옥을 달리고 해서 허리에 차고 다녔다. 그러다가 그는 왕자인 아메노히보코를 만났는데, 여러가지 일이 벌어진 끝에 결국은 붉은 옥을 아메노히보코에게 선물로 줄 수 밖에 없었다. 왕자는 얻은 옥을 베개맡에 두고 잠들었는데 어느 날 옥이 아름다운 여자로 변신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결혼해서 살았다. 하지만 왕자가 어느때 부터인가 여자를 소홀하게 대했다. 이에 서운함을 느낀 여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는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나니와(難波, 오사카)로 왔다. 그러자 왕자는 배를 타고 그녀를 서둘러 쫓아 왔지만, 끝내 신의 허락을 못받아 다른 곳에 상륙해서 살았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해모수 신화와도 유사한 점이 많다.

<일본서기>에는 이 일이 신라 왕자인 천일창(天日槍)이라는 이름으로 조금 다른 내용으로 전해진다. 그는 원래가 신라 왕자인데 스이닌 천황때 동생에게 나라를 넘기고 7개의 보물을 갖고 귀화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7개의 보물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나는 40여 년 전에 무재인남의 설과 나의 뗏목항해를 한 경험을 토대로 항해계기들일 것이라는 주장의 논문을 썼다. 그런데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린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이다. 필시 천일창은 오늘날의 포항시의 영일만인 근오기 지역에 살다가 일본에 어느 지역에 도착해 소국의 왕과 왕비가 된 제사 집단인 연오랑과 세오녀 집단일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천일창(천일모) 설화는 한일 양국의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신라와 관계가 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게히 신궁 역시 천일창의 후손이라는 신공황후와 연관된 것이다.

우리의 역사적인 자존심을 건드리고, 또 역사의 왜곡, 아니 내 관점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해석하는 신공황후와 직접 연관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신공황후는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지만, 소위 삼한정벌에서 돌아온 후에는 아들(응신천황)을 쉬게하려고 이 곳에 보냈다.

이 게히신궁의 󰡔신궁궁사기(神宮宮社記)󰡕에는 이 지역에서 하타(秦)씨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타씨는 교토 부근인 가쓰라 지역에 정착해서 개발한 일본 고대에 최대의 우지(氏)이다. 그는 동해를 건너온 신라계 사람으로서 ‘하타’는 우리말 ‘바다’에서 나온 것 같다고 작고한 김달수 선생이 기술한 적이 있다. 그러니 이곳에서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잘 알려진 인물인 하타노가와가쓰(秦河勝)는 성덕태자 시절에 오늘날의 광륭사를 짓고 현재 국보 1호인 보관미륵반가사유상을 모셨다.

훗날 게히신궁은 고구려와 발해의 사신들을 맞이했었고, 그들이 유숙하는 객관으로도 사용됐다. 발해인들은 727년부터 일본국에 사신을 파견했고, 926년에 멸망할 때까지 공식 사절단만 34회를 파견했다. 최초에는 주로 혼수 북부 해안에 상륙했지만 점차 남쪽으로 내려와 많은 경우에는 이 월(越) 지역, 특히 쓰루가 지역에 상륙했다. 발해인들은 일단 도착한 다음에 일부는 현장에서 몇 달씩 머무르면서 장사를 하고, 나머지 일부는 수도인 나라와 헤이안으로 올라가서 외교행위와 함께 무역을 했다. 그 엄청난 규모와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이 <속일본기>부터 계속 기록됐다. 그리고 발해사들은 귀환할 때는 이 곳의 객관에서 머물다가 다시 다음 장소로 출발했다. 즉 직접 동해를 건너 본국으로 귀국하거나 또는 북쪽인 이시가와현의 노도반도 후쿠라 항으로 이동한 후에 그 곳에서 출항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으로는 이 지역에 ‘신궁사(神宮寺)’가 있다는 점이다. 1982년도에 몇 사람들과 함께 방문했었다. 신궁사란 글자의 뜻 그대로 전통 종교인 신궁과 불교의 사찰이라는 다른 종교가 내용과 양식으로 한데 어울어진 것이다. 즉 재래의 천신지기(天神地祇), 즉 토착신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신사에 부속으로 한 궁사이다. 그런데 불교가 들어오고 국가의 종교로서 공인을 받자 천황가는 점차 토착신들의 입장도 보장해주고, 그들의 지지를 계속 얻어낼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정치적으로 두 종교의 융합과 공존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신궁사라는 양식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신궁의 성격을 가진 사찰인 것이다. 이 와카사 히메(若狹比古)의 신궁사에는 지방호족의 우지가미(氏神)이며 지방의 수호신이 불도에 귀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야마도로 들어가는 길목을 장악한 호족이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카도카(角鹿) 신사로 이동을 했다. 이름부터가 고대 역사와 연관있음을 알려준다.역 앞에 서 있는 무사동상의 사연에서 이야기 했지만, 쓰루가시의 어원이 카노카인데, 이 카도카(角鹿)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니 이 지역에서는 정체성의 핵심이 깃든 장소이다. 나도 개인적인 추억 때문에 오랫동안 사진으로 기렸던 곳이다. 사당 앞에 서있는 도리의 화강암은 여전히 당당한 힘을 내뿜고, 살짝 살짝 묻은 이끼들의 녹청색들도 여전했다. 앞에 서서 길게 늘어뜨려있는 철방울인 ‘와니구찌(鰐口)’를 잡아 흔들어본다. 우리 종처럼 깊고 그윽한 울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난 신라나 고구려, 아니 발해신들이 마중 나올지는 모른다는 바램으로 손바닥을 모으며 지긋이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뭔가를 빌고 빌었다.

천천히 걸어나와 차에 올라타 그 근처인 마쓰바라로 갔다. ‘松原’ 즉 소나무숲으로 이루어진 공원인데 일본의 3대 송원 가운데 하나라고 아름답고 특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는 발해인들이 묵었던 객관이 있었다. <부상략기(扶狀略記)> 라는 책에는 919년 12월 24일조에 발해국사들을 위해 송원관을 지었다.(客狀申云, 遷送松原館 而閉門戶---)고 기록했다. 이 것은 사실 이 지역에 도착한 발해인들과 이곳의 지방 호족이 사교역하는 것을 막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가치가 큰 무역을 정부가 독점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여기에서 발해인들은 당나라 상인들을 만났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무렵에 발해는 이미 망국의 기운으로 흔들리는 중이었다.

잘 생긴 소나무들이 양 옆에 쭉 늘어서 있다. 안으로 들어가도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다. 발해의 자취를 찾으려 고개를 기웃거리던 나는 안타까움을 누르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시간이 부족해 조구(常宮)신사에 걸려있는, 임진왜란때 강제로 떼어져 여기까지 실려와 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종을 못보고 떠난다. 무엇보다도 내게 감동과 충격을 주었던 여러 신라신사들을 못봐서 정말 마음이 안좋다. 그래도 짧은 만남이었지만 참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고, 의미도 컸다. 언젠가 다시 방문하고, 그때는 야마구치를 찾아내 단 하루라도 자면서 밀린 우리들의 젊은 날들을 추억하고 싶다. 이제는 차가 시내를 다 빠져 나왔다. 몇 시간 동안 신라의 자취를 찾아 파도가 출렁거리는 동해가를 달려야 한다.